“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친일 행위로 한국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커다란 흠집을 만든 사람 또한 이광수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언급처럼 이광수(1892.3.4~1950.10.25)에 대한 시각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그는 반골 성향이었다.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는 천도교에서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서기에 올랐다.
그러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해 이듬해 천도교와 연관돼 있던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에 올랐다. 그곳에서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며 언문일치 신문학 운동을 벌였다. 귀국 이후에는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17년 1월 1일부터는 매일신보에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상하이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으로 일하면서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고매한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갑자기 변절한 것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반년 만에 병보석으로 나온 뒤였다. 그는 이후 친일어용단체 조선문인협회 의장을 지내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친일행각을 이어갔다. 그의 일본 이름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였다. 8ㆍ15 광복 후 친일행동으로 구속됐다가 병보석 출감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그는 만포에서 폐결핵이 악화해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