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생각] 10월 11일 興淸亡淸(흥청망청)
돈이나 물건 등을 마구 쓰다
임철순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5~1506)은 채홍사(採紅使)를 파견해 각 지방의 아름다운 처녀를 뽑아들였다. 그 숫자가 무려 1만 명 가까웠다고 한다. 여러 고을에 모아 둔 가무(歌舞) 기생을 운평(運平)이라고 불렀다. 운평 중에서 특히 예쁘고 노래와 춤에 능해 대궐로 불러들인 여자들이 ‘흥청(興淸)’이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쫓겨나자 흥청과 놀다가 망했다는 뜻에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 뒤 멋대로 즐기거나 돈과 물건을 마구 쓰는 걸 가리키는 말로 정착됐다.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비극적 죽음을 알게 된 뒤 재위 10년(1504)에 갑자사회를 일으켜 아버지 성종의 후궁 등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 이를 비난하는 언문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대대적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용의자를 찾지 못한 채 수사를 중단한 다음에는 오히려 언문생활을 장려했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재위 11년(1505) 9월 15일 “이번에 죽은 궁인(宮人)의 제문(祭文)은 언문으로 번역해 의녀(醫女)를 시켜 읽게 하라”고 명한다. 두 달 뒤인 11월 18일에는 흥청과 운평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게 교재를 언문으로도 인쇄하라고 지시했다. 이듬해 5월 29일에는 이렇게 지시했다. “공·사천 또는 양녀를 막론하고 언문을 아는 여자들을 각 원에서 2명씩 뽑아 들여라.”[能解諺文女 勿論公私賤良女 各院選入二人] 이어 이틀 뒤인 6월 1일에는 궁중 용어와 존칭을 잘 모르는 흥청들을 위한 자료를 언문으로 번역해 나눠주라고 했다.
언문에 대한 연산군의 집착은 한글 발전에 순기능을 한 측면도 있다. 언문 진흥보다 유흥과 향락을 위한 것이었지만, 위선적인 신하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 같다고 해석한 학자도 있다. fused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