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됫병 소주와 대짜 안주

입력 2015-09-16 10:36 수정 2015-09-1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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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더 큰 잔에 술을 따르고 이왕이면 마주 앉아 마시자 그랬지. 그래 그렇게 마주 앉아서 그래 그렇게 부딪쳐 보자. 가장 멋진 목소리로 기원하려마. 가장 멋진 웃음으로 화답해 줄게. 오늘도 목로주점 흙 바람 벽엔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1981년 발표된 이연실의 ‘목로주점’이다. 가사에서 끈끈한 정과 대화가 넘치는 목로주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인테리어가 화려한 실내에 곱게 차려입은 마담이 웃음을 건네는 고급 술집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조선 후기에 생겨난 목로주점은 숙식을 겸한 술집인 주막과 달리 술과 간단한 안주만 팔던 싸구려 술집이다. 골목 어귀에 좁은 목판을 길게 덧대어 놓아서 ‘목로’라고 했다. 그러니 목로는 붙박이식 술상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목로주점 중에는 의자가 없어 서서 마시던 곳도 있었다. ‘서서 마시는 술집’이라 해서 생겨난 말이 바로 선술집이다. 풍악과 기생의 노랫가락에 빠져 난봉으로 기운 술판보다 훨씬 맛과 멋이 느껴진다. 목로주점은 목롯집, 대폿집, 목로술집 등으로도 불린다.

목로라는 말에는 그리움, 설렘, 푸근함 등의 감정이 담겨 있다. 사람이 모이는 이곳은 늘 술이 있고 이야기와 웃음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와인, 맥주, 소주(25도, 23도, 17.5도, 17.8도, 13도 등 도수도 다양함), 샴페인 등 술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목로주점에는 막걸리와 소주가 전부였다. 1.8리터짜리 됫병 소주도 고단한 삶을 안주 삼아 마시다 보면 금세 바닥을 보이던 때다. 빈 소주병이 줄을 설 때쯤이면 젓가락 장단에 노래를 부르며 썩어 문드러진 속을 다 쏟아내곤 했다.

2홉 들이 소주에 밀려 추억 속으로 사라진 됫병이 ‘댓병’이란 잘못된 표기로 종종 등장한다. 대부분 큰 병(大甁)이라고 생각해 ‘대병 소주’ ‘댓병 소주’라고 쓰는데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병과 관련된 우리말에는 대병도 댓병도 없다. 됫병만이 바른말이다. 됫병은 말 그대로 한 되를 담을 수 있는 분량의 병을 의미한다. ‘되’는 부피를 재는 단위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한 되는 1.8039리터다.

안주가 좋으면 됫병도 삽시간에 비워지는 법. 술의 고수들은 “다음 날 대자로 뻗지 않으려면 영양가 높은 안주를 선택해 대짜로 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자와 대짜, 잘 구분해 써야 할 말이다. 우선 ‘대자(大字)’는 말 그대로 큰 글자, 혹은 한자 ‘大’자와 같이 팔과 다리를 양쪽으로 크게 벌린 모양을 가리킨다. 주로 ‘대자로’ 꼴로 쓰이며 “그는 피곤한지 대자로 누워 잤다” 등으로 활용된다. 이와 달리 대짜는 중짜, 소짜와 함께 어떤 물건의 크고 작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대(大)·중(中)·소(小)에 ‘-짜’가 붙어 각각 큰 것, 중간 것, 작은 것을 가리킨다. 어원이 분명치 않은 말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맞춤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그래도 헷갈린다면 글자 크기를 나타낼 때는 ‘-자’가, 물건의 크기를 일컬을 때는 ‘-짜’가 붙는다는 것만 기억하자.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로 시작하는 불후의 명곡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서울 명동 뒷골목 목로주점에서 탄생했다. “마담, 술 좀 줘요.” “또 외상이야?”…. 박인환 선생과 마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서른한 살, 짧지만 강렬했던 시인의 문학 인생을 이야기하며 목롯집에서 술 한잔 하고픈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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