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한 장면이다. “내 집을 장만하리라” 마음먹은 주인공 수남(이정현). 투잡, 쓰리잡을 넘어 다(多)잡족인 수남이 그린 내 집 마련 계산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돈을 모아도 집값은 뛰고 빚만 쌓인다. 악착같이 살지만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형편. 영화의 포스터 문구는 ‘열심히 살아도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불성실한’ 나라. 요샛말로 ‘헬조선’이다. 헬조선이란 말 그대로 ‘지옥(hell) 같은 한국’이란 뜻이다. “아무리 해봐야 이 땅에선 안 돼”. 절망한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에 붙인 이름이다. 흙수저 물고 태어난 이는 끝까지 흙수저 인생을 살 뿐이란 자조가 담겨 있다.
헬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춥다. 이달 초 한 아웃도어 브랜드가 조사한 한국인 마음온도는 평균 ‘영하 14도’. 세대별로는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이 영하 17도로 가장 낮았다. 그야말로 겨울왕국이다. 한데 이 조사에서 필자의 시선을 끄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언제 마음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는가 하는 질문에 세대를 막론하고 ‘훈훈한 이야기(뉴스)를 접할 때’를 꼽았다는 사실이다.
미담을 갈구하는 시대란 얘기다. 인간애가 묻어나는 삶의 모습,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인생 드라마, 소외되고 힘없는 존재에 대한 따뜻한 손길…. 희망이 보이지 않는 모진 현실에 염증난 사람들은 감동을 원한다. “뭐 같은 세상”이라고 욕하다가도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돕는 사람들,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뤄내는 사람들, 소소하지만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에 “아직 살 만하구나” 위로받는다. IMF 경제위기 때 모 일간지는 1면에 꼬박꼬박 미담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요즈음 미담기사는 과잉 소비되고 있다. 언론사들은 뉴스 스토리를 요구하는 독자들을 위해 내러티브식의 미담을 ‘만들어낸다’. 포털들도 마찬가지다. 미담류의 기사들을 한데 모아 확실하게 보여준다. 미담기사는 확산 속도도 빠르다. SNS에서 ‘좋아요’와 ‘공유하기’를 누르도록 만드는 것은 얼마나 감정을 건드리느냐에 달려 있다. 위안을 주거나 행복감이나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기사는 공유 1순위다.
그러나 미담기사가 넘쳐난다고 좋은 것인지, 무작정 ‘좋아요’를 눌러도 되는 것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미담기사에는 함정이 있다. 무엇보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 차원의 문제로 환원시킬 위험성이 크다. ‘아름다운 장면’에만 포커스를 맞추다보니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사회의 구조와 체제가 은폐된다. 미담에 등장하는 약자들을 한번 떠올려보라. 가난하거나 소외된 이들, 미혼모, 장애인, 독거노인, 더 나아가서는 유기동물들까지. 이들을 역경이나 곤란에 놓이게 한 사회적인 모순과 병폐는 숨겨진다. 애정과 노력, 의지로 극복하는 모습이 그저 ‘좋지 아니한가’인 거다.
희귀 유전병을 지닌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겸 방송인 스텔라 영은 작년 TED강연에서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이야기나 이미지를 ‘감동 포르노(inspiration porno)’라며 비판했다. 장애를 통해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식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장애인을 물건화해 비장애인에게 파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상실한 채 긍정 지상주의를 부각하는 미담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물건화’한 편협한 시각이기 때문이다.
무심코 좋아요를 누르고 권유한 미담기사가 실은 이런 맥 빠진 ‘포르노’였다면? 감동에 치우친 미담에 안주하는 한 헬조선은 결코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