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관련 자료 수집·전시… 운영난 속에서도 개관 10주년
우익단체들의 항의시위 우려해 비교적 안전한 대학 안에 위치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날이지만 일본은 침략지에서 패퇴(敗退)해야 했던 날이다. 일본은 못내 억울했던지 종전 조서에서도 패배와 항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결정을 성단(聖斷)이라는 말로 호도했다.
이러한 적반하장(賊反荷杖)은 7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익 단체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를 담은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올해도 일본 각료와 정치인들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잊지 않았다.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 철폐 서명 운동이 도쿄(東京) 시내 한복판에서 버젓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본군들의 성노예가 되어 여성으로서의 권리, 인간다울 수 있는 권리를 유린당했던 위안부는 20만 명이나 됐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런 죄목의 재판은 없었다. 그런데 2000년 12월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제를 단죄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이 열렸다. 아사히(朝日)신문 기자 출신인 마쓰이 야요리(松井耶依) 바우넷(VAWW-NET: 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재팬 대표와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 필리핀의 인다이 샤호루 여성 인권을 위한 아시아센터 대표 세 명이 주도해 열린 이 법정(물론 진짜 법정이 아니라 이벤트였다)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죄목으로 일왕과 일본 정부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는 전 세계에 위안부 문제를 부각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마쓰이 야요리 대표는 기자였을 때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재와 일본의 잘못을 알리는 데 힘썼다. 남성들이 잘 가지 않는 아시아 지역 특파원을 자원하면서 알게 된 여성들의 신산했던 삶이 계기가 됐다. 그는 1991년부터 아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재판을 대신해 나섰지만 일본 정부를 피고로 했던 10여건의 재판 모두 패소하고 만다.
30여 년간 여성 인권 향상과 위안부 문제 해결에 몸을 아끼지 않았던 마쓰이 대표는 2002년 말기 간암 판정을 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유산과 자료를 위탁하며 위안부 박물관을 만들어줄 것을 주변에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 바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이다. 2005년 8월 개관한 WAM은 도쿄 번화가인 신주쿠(新宿) 와세다(早稻田)대학 캠퍼스 내 아바코(AVACO)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자료관에 가면 동남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사진부터 만나게 된다. 벽면에 빼곡한 그 사진은 “우리의 존재를 알아 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케다씨는 NHK를 정년퇴직한 이듬해인 2011년 이곳 관장을 맡았다.
WAM의 존재 목적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고 배상토록 하는 데 있다. 일본 사람들 가운데에선 이곳을 방문하고서야 위안부의 존재를 안 이들도 많다. 이케다 관장은 인식의 확장을 원한다며 “일본 정부가 숨기려는 사실을 국민에게 정확하게 알려야 할 의무감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취재 시 관련 자료는 대부분 무료로 제공받는다. 그런데 필요한 자료들을 요청하자 직원이 웃으며 돈을 내라고 했다. 팸플릿이나 책자를 모두 유상으로 제공한다고 했다. 마쓰이 대표의 유산과 일부 개인 지원만으로는 자료관 운영이 쉽지 않음을 짐작하게 했다. 매년 적자란다. 번화가에 있어 임대료도 비싸지 않으냐 물었더니 이케다 관장은 “개인들의 공간 제안도 있었지만 우익 단체들이 와서 방해하면 위험하다. 여기는 학교 근처라 안전해서 택했다”면서 “시대 상황과 정부가 금기시하는 여성사를 알리는 데 10년간 버티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여성이 역사를 만든다-세계 여성박물관 현지 취재] <7>인터뷰- 이케다 에리코 日 WAM 관장
“아베 총리도 이곳 전시물 본다면 과거사 부정 못해”
위안부 증언을 해 주었던 할머니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전쟁을 경험 못한 세대로 넘어가고 있지만 일본의 학생들은 위안부의 존재가 언급조차 되지 않는 역사 교과서로 학습하고 있다. 성인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알더라도 금기시하는 것이 위안부라는 존재다.
이케다 에리코(池田惠理子·65)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관장은 역사를 부정하고 가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위안부 관련 자료를 모으고 세상에 알리고 있다. 엄연히 존재했던 위안소를 증언을 토대로 지도로 만들었다. 위안소의 규정과 사진, 공문서, 증언 비디오 등이 작은 자료관 내에 빼곡히 차 있다. 방문자들이 쓴 감상 노트에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랍다는 내용이 많다. 사실 이케다 관장 또한 1991년까지 위안부의 존재를 몰랐다.
“NHK에서 PD로 근무하다 1991년 취재를 통해 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됐다.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던 아버지도 전혀 얘기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알고 나니 일본 정부가 위안부나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위안부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1997년까지 8편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인으로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을 터. “위안부 프로그램이 방송되자 우익 단체들이 항의와 협박을 했다. 어머니만 살고 계신 내 고향에 내려가 항의를 했고 격렬하게 맞붙기도 했다. 그래도 이건 우리 일본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일본 언론에서는 거의 취재를 오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취재하러 온다. 힘들어도 우리가 자료관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
37년간 NHK에서 일하고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이케다 관장 역시 여성으로서 쉽지 않은 길을 걸었을 게 분명하다.
“제가 NHK에 들어갔던 1970년대엔 남성이 80명 뽑혔다면 여성은 3명 정도 뽑히는 식으로 매우 적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만들어지면서 조금씩 상황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여성의 숫자가 적고 위상도 낮다. 그래도 내가 20년 전 PD 시절 만들었던 ‘여성은 치한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같은 프로그램은 만들지 않아도 되고, 1980년대엔 있지도 않았던 성희롱이란 단어도 있다. 점점 나아져야 할 것이다.”
이케다 관장은 “매년 적자이고 어렵지만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온 일을 할 것이다. 피해자 사실을 일본 정부가 인정하게 하고 공식 사과와 배상을 하게 하고, 이것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일이다. 정부가 숨기려 들기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 현재 일본 언론들은 위안부, 난징(南京)대학살, 쇼와(昭和) 천황의 전쟁 책임문제를 모두 금기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라도 나서서 이걸 알려야 한다. 일본인들도 의식이 있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은 자료관을 찾아오신다. 교육자들도 많이 방문하고 있다. 아베 총리도 와서 전시물을 본다면 과거를 절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작지만 출발 후 10년간 꿋꿋이 운영해 온 WAM. 없어질 수 없는 과거를 갈무리하고 그것을 전파하려는 의지력이 이 작은 공간에 충만했다. 단발적인 구호와 시위보다 어쩌면 이런 ‘공간’의 존재가 이어지는 것이 더 힘이 셀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