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현상에 대해 취임 후 처음으로 인정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의 발언은 10일(현지시간) 외환시장과 BOJ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이날 구로다 총재의 “더 이상의 엔저 현상은 없다”는 발언 여파로 도쿄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달러당 124.6엔에서 122엔대로 급등했다. 같은 날 뉴욕 외환시장에서도 엔화 가치는 달러에 대해 지난 3월18일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동안 BOJ는 물가상승률(인플레이션) 목표치 2% 달성을 위해 시중에 대량의 유동성을 공급하며 엔화 약세를 유도했다. 그러나 이날 구로다 총재가 엔저를 공식 인정함으로써 시장에서는 향후 정책을 선회하고 동시에 BOJ가 추가 양적완화(QE)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고조됐다.
구로다 총재가 “실효 환율 측면에서 엔화 가치가 매우 낮은 것으로 보인다”며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시장에서는 강달러·엔저 현상에 대한 견제 발언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엔화 가치가 요동치자 BOJ는 “구로다 총재의 발언이 시장에서 왜곡됐다”며 해명에 나섰다.
아마리 아키라 일본 경제재생담당상은 기자회견을 통해“구로다 총재의 발언 취지가 약간 왜곡돼 시장에 전달됐다”며 “구로다 총재는 자신의 발언이 시장에 큰 변화를 줬으나 그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BOJ가 구로다 총재의 발언에 따른 시장 변동성에 적지않게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BOJ 내에서는 구로다 총재의 발언을 엔화 약세가 디플레이션 탈출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으로 풀이했으나 시장은 전혀 다르게 받아 들였다는 것.
일각에서는 이번 구로다 총재의 발언 배경을 최근 지속된 강달러와 엔저 현상에 따른 국제사회의 반발로 봤다. 엔화 가치 하락으로 미국 등 교역 상대국이 채산성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고, 미국 기업 역시 엔화에 대한 달러 강세도 불만이 높아졌다. 이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결국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지난 8일 폐막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엔저 현상은 많은 (미국)기업이 고통받고 있고 결국은 달러 강세(엔화 약세)가 문제”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일본이 엔저 수위를 조절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 대다수다. 일본은 미국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을 원하고 있어 지나친 엔화 가치 하락으로 미국 의회 내 TPP 반대파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엔저의 심화는 미국 기업에 직격탄을 주기 때문에 자칫하면 미 의회의 비준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바탕에 깔려 있다.
다만 BOJ의 물가상승률 목표치 2%를 실현하기 위해선 엔화 가치 하락이 필요한 만큼 수위 조절에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