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저녁. 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향해 떠났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강남의 어느 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문상(問喪)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망자가 가족과 갑작스럽게 이별한 것은 아닌 지를 가장 먼저 챙겨보게 된다. 몇 개월 가량 요양병원에서 노환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던 이별이라고 했다.
어느새인가 문상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상가(喪家)가 지인들과 안부를 묻는 정기적인 자리가 되고 있다. 조금 더 나이를 덜 먹었을 때엔 결혼식장이 그 역할을 했고 조금 더 지나선 돌 잔치집이 그러하였는데 말이다. 조의금만 보내선 미안한 부모상이 많아졌고 아주 가끔은 본인상도 있으니 이렇게 모이게 되나 보다. 조금씩 우울해지는 표정들을 의식해서인지 누군가는 짐짓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곧 자녀 결혼식장에서들 안부 교환을 하게 될거야”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본인상에서들 만나게 될 것을.
그러나 이 자리가 파하면 우리는 또다시 죽음따위는 없다는 듯 달리게 될 것임도 안다. 과음과 과로와 과속의 일상을.
이번 설 연휴는 다행히도 과속을 일삼던 운전대에서 내려와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올려둘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 잠시 멈춤과 숨고르기, 그리고 이렇게 달리는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지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 또한 줬다. 왕성한 연구와 집필 활동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미국의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를 통해서였다.
색스는 지난 1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칼럼(http://www.nytimes.com/2015/02/19/opinion/oliver-sacks-on-learning-he-has-terminal-cancer.html?action=click&pgtype=Homepage®ion=CColumn&module=MostEmailed&version=Full&src=me&WT.nav=MostEmailed&_r=0)을 통해 자신이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9년 전에 수술받은 안암(眼癌), 잘 전이도 되지 않는다는 그 암이 간으로 옮겨가 이제 살 날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고 알린 것이다.
색스의 칼럼 ‘나의 인생(My Own Life)’은 그가 좋아했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죽음을 목전에 둔 65세의 어느 날 급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쓴 글의 제목을 그대로 따 왔다. 그러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색스에 따르면 흄은 그 글에서 “삶 속에 있는 것보다 빠져 나오는 것이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 색스 또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척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남아있는 몇 개월의 시간을 불필요한 것에 할애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 그러니까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쓰는 거에 오롯이 할애할 것이며 세계와 소통하겠다고 했다. 그런 계획을 갖고 있는 자신에게 더 지배적인 감정은 ‘감사’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가 위대한 것은 그가 혁신적인 기술을 통해 세상을 바꿔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외부 변수나 타율(他律)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의 지향점을 재확인하고 지나온 길을 반추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17세의 잡스는 “만일 당신이 매일의 삶을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란 문장과 조우했다. 우리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잠언(箴言)이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었다. 잡스는 그 이후 30여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잡스는 “내가 곧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장 도움이 되었던 도구”라며 그런 면에서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라고 했다.
좀처럼 오기 힘든 연휴 동안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쉬고 ‘비로소’ 집에 있으면서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물건들 생각들을 정리해보려 했을 것이다. 엄두가 나지 않아 정리가 더 진전되지 못한 경우가 아마도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치우겠지, 언젠가는 생각해 보겠지라고 변명하며. 그러나 그 ‘언젠가’는 여간해선 오지 않는다. 우리 삶에 대해 생각할 시간 약속을 주택대출 원리금 납부나 진료 예약 만큼만 중요시하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