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이 세계경영을 주창하며 벌인 지나친 확장 투자로 몰락한 것이 아니라 경제 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로 인해 기획 해체됐다는 김우중(78) 전 대우그룹 회장의 육성 주장이 공개됨에 따라 당시 대우그룹 해체 결정을 사실상 주도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김우중 전 회장의 악연에 새삼 눈길이 쏠린다.
김우중 전 회장은 21일 일부 내용이 공개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 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에서 비롯됐다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했다.
저자 신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대우그룹 해체 15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내몰린 이유에 대해 경제관료들이 자금줄을 묶어놓고 대우에 부정적인 시장 분위기를 만들면서 부실기업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우그룹 해체안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정책라인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은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였다는 점에서 김 전 회장의 발언은 사실상 이 전 부총리를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책은 이 전 부총리가 2012년 낸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김우중 전 회장과 대우차와 관련해 기술한 부분을 인용하며 이 전 부총리를 직접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
외환위기 이후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주도하던 당시 경제정책 라인은 공격적인 경영을 통해 몸집을 불려온 대우그룹이 간신히 본궤도로 회복되던 한국경제에 일대 혼란을 줄 수 있는 위험 요소로 판단해 대우그룹 워크아웃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김우중 전 회장이 정부의 해법에 반발하며 알력을 빚다 결국 대우그룹이 해체 수순을 밟았다는 게 그동안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다.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으로 대표되는 경제라인은 국가와 은행, 재벌의 연계 하에 효력을 발휘한 국가주도의 산업정책, 자본주의, 재벌의 '대마불사' 논리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뜯어고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강도 높은 재벌 개혁 및 기업·은행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당시 경제라인의 시각으로는 1980년대 이후 차입을 통해 부실기업을 인수, 회생시키는 방식으로 기업을 확장시켜온 대우그룹이 1998년 말부터 계열사 축소 등 구조조정 및 재무구조 개선 계획 등 자구노력 계획을 끊임없이 발표했지만 결국 금융시장에서 버티지 못하며 그룹 해체 수순을 밟게됐다고 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부총리는 "대우가 해외에서 차입한 현지금융은 자기책임하에 현지에서 스스로 해결해야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나 불법사례가 있었다면 방관하지않겠다. 책임소재를 엄격히 규명하겠다"는 등의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며 정부 정책에 반발하던 김 전 회장과 날선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 전 부총리가 대우그룹 해체 직후인 1999년 12월 9일 전경련 오찬간담회에서 한 발언은 주목할만 하다.
그는 당시 간담회에서 "항간에 현 정부가 반재벌 정책을 펴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반재벌 정책은 없다"며 "시장 원리에 입각해 모든 기업들이 스스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켜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대우사태는 기업회계 투명성 등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며 "지난해 11월 김우중 전회장에게 IR 활동의 일환으로 대우의 정확한 사정을 국내외에 하루 빨리 알리도록 요청한 적이 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해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이 책에서 경제관료들이 대우그룹을 기획해체시킨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이 아닌 적극적인 수출로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향한 자신의 조언을 경제관료들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대통령 앞에서 강하게 내세우는 과정에서 경제관료들과 크게 충돌했고, 이것이 감정 대립으로 전개돼 급기야 대우에 대한 나쁜 보고서가 하루가 멀다하고 청와대 쪽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행정고시 수석 합격 후 재무부 관료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 전 부총리는 김 전 회장의 경기고 후배다. 관료 생활을 어쩔 수 없이 그만두고 야인생활을 할 때 김 전 회장의 도움으로 ㈜대우 상무, 대우반도체 대표이사 전무로 대우에서 4년을 보낸 '대우맨'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서 결국 악연으로 변했고, 그 악연은 이번 김 전 회장의 대화록을 통해 15년 넘게 새삼스레 다시 주목받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