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집단자위권 추진은 2006~2007년 제1차 아베 내각 때부터 시작됐다.
2006년 9월 전후세대로는 처음이자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달고 취임한 아베 총리는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전후체제(패전의 결과로 받아들이게 된 평화헌법 하의 일본체제) 탈피’를 향한 첫 과제로 집단자위권을 선택했다.
그는 과거 자신의 저서를 통해 ‘미국과 일본 국민이 상대 국민을 위해 피를 흘릴 때 동등한 동반자 관계가 된다’고 언급할 정도로 집단자위권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아베 총리는‘과업’ 달성을 위한 첫 단계로 2007년 4월 집단자위권을 논의하는 자신의 자문기구인 ‘안전보장의 법적 기반에 관한 간담회(안보법제간담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제1차 아베 내각이 1년 단명으로 끝나 그 뜻을 접어야 했다.
2012년 12월 총선거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 총리는 다시 집단자위권을 추진했다.
중국이 해양진출을 확대를 꾀하며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주변 해역에서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북한도 2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해 안보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각심은 7년 전에 비해 한결 높아졌다. 안보환경이 달라지며 집단자위권으로 미ㆍ일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아베 총리는 취임 이후 한동안 안보와 역사 등 ‘논쟁 사안’의 의제화는 피하고 ‘아베노믹스’를 전면에 내세워 안정적인 정권 지지기반을 구축했다.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저와 주가상승으로 작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하면서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함께 중ㆍ참 양원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집단자위권을 추진했다.
아베 총리는 개헌의 문턱을 낮춤으로써 교전권을 부정한 헌법 9조를 개정하는 정공법은 어렵다고 판단한 아베 총리는 각의(국무회의) 결정을 통해 헌법해석을 변경하는 ‘해석개헌’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작년 8월 헌법해석을 담당하는 내각법제국 장관을 집단자위권 용의파로 교체하며 아베 총리는 거침없이 일을 추진했다.
지난 5월 15일 아베 총리는 안보법제간담회가 작성한 ‘관제보고서’를 받고 나서 집단자위권과 관련한 헌법해석을 변경하려는 구상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러나 공명당이 5월 20일부터 시작된 연립여당 협의에서 집단자위권의 남용 방지장치 부재 등을 거론하며 저항했다.
아베 총리는 주변 인사를 통해 ‘창가학회(공명당의 모체인 종교단체)와 공명당의 관계는 정교분리에 위배되지않는다’는 정부 견해를 수정할 가능성까지 제기하며 압박하자 한 달 만에 공명당은 백기를 들었다.
지난달 26일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가 “헌법의 규범성 등을 유지하면서 헌법해석을 정리ㆍ보충하고 명확히 하는 기능을 정부가 갖고 있다”며 집단자위권 헌법해석 변경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혀 아베 총리의 집단자위권 추진 마지막 관문이 통과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