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억짜리 저택에 사는 목수와 학자금 대출금을 갚느라 고생하는 판검사’, ‘18세 미만의 아이들에게 1년에 무조건 평균 230만원 지급, 접시닦이로 주5일 하루 8시간 근무했을 경우 월 400만원’….
한국으로 귀화한 러시아 출신의 박노자 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를 통해 노르웨이의 일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박 교수는 노르웨이의 복지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돈 벌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당당하게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시장 사회에서 노동을 팔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생계와 복지를 사회가 당연히 책임진다. 모든 시민이 똑같은 사회적 권리를 누리며 똑같은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 같은 이념이 복지국가 노르웨이를 지켜주고 있다는 해석이다.
노르웨이는 노인복지에서도 ‘천국’ 수준이다. 지난해 미국 경제 전문 매체 CNBC의 보도에 따르면 노르웨이는 노인의 연평균 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로 조사됐다. 노르웨이 노년층의 연평균 소득은 지난해 7만8637달러(약 8339만원)로 집계됐다. 이에 비해 65세 이상 노년층의 세계 평균 소득은 1만4541달러(약 1543만원)에 불과했다. 톨비요른 홀테 주한 노르웨이 대사를 통해 노인들이 ‘천국’에 가까운 생활을 누리고 있는 노르웨이에 대해 알아봤다.
◇유토피아에 가까운 복지제도=노르웨이는 세계 여러 국가 중 유토피아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는 나라다. 고등학교까지 완전 무상교육이고 공립학교의 경우 대학원까지 무료로 다닐 수 있다. 병원비는 공짜다. 병에 걸려 직장에 못 나가면 국가에서 돈을 준다. 출산육아휴직은 기본이고 실업자와 장애인에게도 수당을 지급한다. 풍족한 복지제도로 인해 노르웨이에는 개인연금이 필요 없을 정도다.
홀테 대사는 “노르웨이 복지시스템은 사회복지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다. 복지를 통해 인생 경로 전반에 걸쳐 벌어질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고 있다”며 “노르웨이 노인복지의 핵심은 국민연금이다. 연금제도의 기본 원칙은 스스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재정적사회적 보장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르웨이 복지제도는 긴 투쟁과 타협의 결과다. 이미 19세기 후반 노동운동에 의해 실업급여가 도입되면서 시작된 복지제도는 사회보험 체계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발전했다. 건강보험에 대한 최초의 법률은 1909년 제정됐고 퇴직연금법은 실업수당법이 생긴 지 2년 후인 1963년 채택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국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놓고 정치적 충돌이 있었다. 좌파는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세금을 재정기반으로 하는 복지국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반면 우파는 연금이 은퇴 이전 소득에 따라가는 시스템을 추진했다. 1950년대 정치권에서는 좌파가 우세했기 때문에, 1956년 건강보험 제도가 모든 주민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됐다.
1960년대 이후에는 다시 연금제도의 균형을 잡았다. 1966년 의회는 모든 복지제도를 하나로 병합해 은퇴 이전 소득을 기본으로 책정되도록 했다.
홀테 대사는 “오늘날 노르웨이의 복지시스템은 오랜 투쟁의 결과이며,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보장뿐만 아니라 은퇴 이전 소득과 연계되도록 한 타협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르웨이의 노인정책은 긴 전통을 가진 종합적 복지시스템의 일부다. 노르웨이 복지시스템의 핵심 가치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삶의 기본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라며 “노르웨이 사람들은 복지제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세금을 납부하려고 한다. 때문에 정부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하다. 지속 가능한 복지정책을 위한 부의 재분배 원칙은 노르웨이 정치권 전반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급속한 고령화로 노르웨이도 정책 수정=노르웨이가 꿈같은 복지제도를 실행할 수 있었던 데는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컸다. 노르웨이는 정권 변화에 연금제도가 영향받는 것을 최대한 차단해 연금 가입자에게 신뢰를 받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노르웨이의 복지제도를 설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복지제도를 위한 재원을 노르웨이는 도대체 어디서 충당했을까.
알아둬야 할 것은 노르웨이는 세계 10대 산유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1960년대 후반 북해를 시작으로 해안선을 따라 잇따라 유전이 발견되면서 산유국 대열에 합류했다. 노르웨이는 유럽 국가 중 대륙붕에 가장 많은 석유와 가스를 보유한 나라다. 현재 세계 7위의 원유수출국이고 가스생산량은 세계 3위다.
노르웨이 복지제도 재정의 근간은 노르웨이 정부연금기금(GPFG)이다. GPFG는 세계 최대의 국부펀드다. 지난 1월 기준 자산규모가 8300억 달러(약 880조원)에 달한다. 노르웨이 인구가 500만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니 국민 1인당 1억8000만원에 가까운 금액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펀드 자금은 대부분 거대 석유 기업들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석유산업을 통해 인구에 비해 연금기금을 든든하게 쌓아놨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넉넉한 복지제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랬던 노르웨이도 급속한 고령화의 충격에 연금개혁에 나섰다. 2011년부터 1963년 이후 출생자에 대해 기초연금을 폐지하고 저소득층에만 선별적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최저보증연금제도를 도입했다.
은퇴를 늦게 할수록 연금 수령액을 높여 일을 오래하도록 유도했다. 이웃 나라 스웨덴처럼 연금제도를 명목확정기여 방식으로 변경했다. 자신의 소득수준에 따라 보험료를 내면 경제성장률과 기대수명을 반영해 연금을 주는 것이다. 연금도 정부 예산에서 나가도록 하고 GPFG의 사용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석유 고갈에 따라 GPFG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홀테 대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도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며 “은퇴자를 부양하기 위해 1967년 3.9명의 근로자가 필요했지만, 2050년에는 1.7명까지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연금개혁의 배경을 설명했다.
연금제도의 개혁에도 세대 간 갈등이나 진통은 없었을까. 홀테 대사는 “노르웨이에서는 복지시스템에 대한 세대 간 갈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수십년간의 개발 과정을 거쳤고, 복지정책의 효율성이 입증돼 대중의 신뢰가 생겼다”며 “복지시스템의 기초에 대한 폭넓은 정치적 합의로 세대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노인 복지정책과 관련, 한국인 특유의 효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노인 봉양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한국의 가정이 노인복지 정책에 큰 자원이 될 수 있다. 정부는 노령 환자를 돌보는 가족을 지원해 노인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며 “노르웨이에서는 노인을 돌보는 가족에게 지원금을 주고 있다. 가족만큼 노인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는 노인복지 정책에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