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1월부터 전면 시행하겠다며 17년간 준비한 도로명 주소다. 옛 지명을 살리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짓겠다던 취지와는 달리 외래어 투성이다. 그것도 표준 외래어가 아닌 국적 불명이 수두룩하다. 정부의 도로명 주소 추진 과정을 보면 ‘호통과 불통’으로 요약된다.
도로명 주소는 종전의 ‘동·리+지번’ 대신 ‘도로명+건물번호’로 만들어졌다. 도로에 이름을, 건물에는 도로를 기준으로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국민 의견을 반영한 흔적은 없다. 자기 집 도로명 주소를 외우기는커녕 내년부터 전면 시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국민이 절반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국민 불편은 안중에도 없는 게 ‘소통’을 강조한 새정부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국민은 번번이 호통을 듣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가 지번 주소를 쓰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의 토지조사사업 때부터로 100년이 넘었다.
정부의 도로명 주소 사업은 1996년 국제 수준의 주소 체계를 구축해 국가경쟁력 및 위상을 제고한다는 취지로 개편이 결정된 이후 2007년 도로명주소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일본 잔재 청산이라는 이유도 있다.
도로가 먼저 만들어지고 집들이 들어선 미국, 유럽과 같은 구획정리가 잘된 선진국의 도로주소 체계를 따른다지만 우리의 도로명 주소는 현실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집들이 지어지고 그 사이사이로 골목길들이 만들어진 탓에 획일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무엇이 급한지 2007년, 2012년에 이어 2014년에 다시 전면 시행하겠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국민 불편은 불 보듯 뻔하다. 도로명 주소에 익숙하지 않은 우편, 택배, 경찰, 소방, 동사무소 등의 업무 차질은 불가피하다.
가장 큰 불편은 긴 이름이다. 읽기도 어려운 ‘부산 강서구 녹산산단 382로 14번가길 29’의 현재 주소는 ‘부산 강서구 송정동 1737-9번’으로 간략하다. 또 대도시의 동 이름을 없애다보니 여러 지역에서 혼동할 수 있는 같은 이름이 산재한 것도 문제다. 가령 ‘양재대로’는 강남, 서초, 송파, 강동은 물론 심지어 경기도 과천시까지 13개동에 2792개의 주소가 검색된다. 흔한 중앙로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무려 4만4247건이나 된다.
문제는 또 있다. 인천 로봇랜드로와 같이 건물이 없는 곳에 지어진 유령 주소가 허다하다. 역사성 있는 서울 종로구 72개 동네 이름 중 59개 등 조선시대 이후 만들어진 각 지역의 동 이름 5000개도 사라지게 된다.
도로명 주소로 개편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간단해 보이던 우측통행도 시행 3년이 지나도록 지하철 이용자 70%가 좌측통행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로명 주소는 정부가 재촉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줘야 대혼란을 피할 수 있다.
일본도 1962년 이후 도로명 주소 사업을 본격 시행했지만 50년 넘게 바꿔가는 중이다. 국민을 다그치지 않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