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롯데그룹의 심벌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손에서 35년 만에 새롭게 태어났다. 빨간색 원 안에 영문 알파벳 ‘L’자가 3개 겹쳐 있던 심벌마크는 금색으로 바뀌었다. 이는 유명 외국 디자이너 작품이 아니다. 통상 디자이너에 의해 제작하지만, 롯데그룹 직원들의 아이디어가 모여 탄생한 것이다.
신 회장은 당시 직원 200여명 대상으로 디자인과 선호도를 물었다. 직원들은 ‘눈에 잘 띈다’는 이유로 금색을 많이 골랐고, 결국 새로운 심벌은 워드마크 형태의 금색 ‘LOTTE’로 결정됐다.
심벌 제작 과정을 보면 ‘실속’을 중시하는 신 회장의 성향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아버지인 신격호 총괄회장 집무실에는 ‘거화취실(去華就實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내실을 지향한다)’이란 사자성어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이는 롯데그룹을 지탱하는 기본 철학으로, 신 회장은 아버지의 신조를 이어받았다.
2011년 ‘신동빈호 체제’ 출범 이후 신 회장은 소리 없이 강한 ‘거화취실’ 리더십으로 자신만의 ‘롯데’를 만들어가고 있다.
◇아버지 신조 본받아 ‘실속파’…몸에 배인 겸손= 2011년 2월 11일 롯데의 수장이 된 신동빈 회장의 첫 출근길은 부회장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수행비서를 따로 두지 않았고, 서류가방을 직접 든 채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무실로 향했다. 별도의 취임식도 열지 않았다.
거화취실을 평생의 신조로 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다. 지난 1997년 롯데그룹 부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회장 취임 전까지 14년간 신 총괄회장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았다. 가장 높은 사람은 ‘고객’이라고 말하는 신 총괄회장 역시 수행원도 없이 매장을 자주 방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배운 신 회장 또한 실속파로 통한다.
회장으로 승진한 후 처음 참석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에서 내놓은 와인도 겉모습(가격)의 화려함보다는 내실(맛)을 택했다. 전경련 회장단 만찬을 맡은 신 회장은 롯데호텔 식당인 ‘피에르 가니에르’에서 ‘동 페리뇽 2002(샴페인)’, ‘조셉 드루앵 코동 샤를르마뉴 2007(화이트와인)’, ‘조셉 드루앵 포마르 2007(레드와인)’을 준비했다. 가격은 20만원선으로 저렴하지만 맛은 뛰어나다.
신 회장은 여느 회장들과 달리 모든 임직원에게 경어를 쓰고, 명함을 교환할 때도 늘 두 손을 사용한다. 말 그대로 겸손이 몸에 배인 것이다. 이는 영국에서 익힌 비즈니스 매너가 크게 작용했다. 신 회장은 국내 대기업 오너로는 드물게 국제금융의 본고장인 영국 런던에서 투자은행(IB) 업무를 배웠다.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증권 런던지점에서 8년여간 근무하며 IB 업무와 국제금융경제를 익힌 IB 전문가로 통한다.
◇‘사람’ 겉모습으로 판단은 금물…모든 차별 철폐 주문= “세계 어느 곳에서도 롯데인으로서 일체감을 가져라.” 신 회장이 신입사원에게 배지를 달아주며 전하는 말이다. 신 회장은 직원들에게 롯데인의 자긍심을 가지라고 항상 주문한다. 이 또한 아버지의 기업문화를 그대로 실천하는 대목이다.
롯데는 하나의 고객으로서, 회사의 자산으로서 ‘사람’을 중시한다. 롯데는 직원들을 ‘식구(食口)’라고 강조한다. 일단 뽑은 직원은 함부로 내치지 않는다. 게다가 인재 등용에도 차별이 없다.
신 회장은 올해 ‘2013 HR(인적자원) 포럼’에서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성별문화장애세대 등 각종 차별 철폐를 골자로 한 ‘롯데그룹 다양성 헌장’을 제정했다. 롯데그룹의 HR포럼은 국내외 전 롯데 계열사의 인사노무교육 담당자 500여명이 모여 한 해의 주요 이슈를 논의하는 자리다.
신 회장은 “다양한 사고를 가진 인재들이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중요하다”며 “태생적문화적외형적 차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는 개방적이고 공정한 조직문화를 지향하겠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자신의 사람을 특별히 아끼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대표적 ‘신동빈의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인원 롯데쇼핑 부회장은 10대그룹 장수 최고경영자(CEO)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다. 신 회장을 도와 롯데그룹을 국내 제일의 유통기업으로 도약시켰다는 평을 듣는 이 부회장은 16년간 CEO를 맡아왔다.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신 회장의 총애를 받아 롯데그룹 최초로 부회장 직함을 단 주인공이 됐다.
◇혁신 경영으로 글로벌 비전 달성= 신 회장은 최근 비제이 고빈다라잔 미국 다트머스대 턱경영대학원 석좌교수가 쓴 책 ‘리버스 이노베이션(역혁신)’을 직원들에게 사서 나눠 줬다. 책에서 의미한 역혁신은 미래의 기회가 선진국 시장이 아니라 신흥개발국에 있으며 신흥개발국에서 이뤄진 혁신, 즉 역혁신이 결국 선진국 시장으로 역류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장 취임 이후 그가 만들어가는 롯데는 ‘혁신 경영’에 주력하고 있다. 내실에 집중하는 아버지의 경영 스타일을 물려받았지만 자신만의 롯데에서는 거화취실의 정신을 살려 실속 있는 혁신 경영을 펼치고 있는 것. 즉 혁신은 추구하되 허세는 부리지 않는다는 의지다. 일례로, 킴스클럽 인수를 놓고 신세계 이마트와 경쟁할 때 적정 가격이라고 보는 금액 이상으로는 써내지 않았다. 신 회장은 신세계의 손에 킴스클럽이 넘어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다.
롯데 관계자는 “인수에 성공하겠다는 명분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돈을 쓰지 않는 게 신 회장의 뜻”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과감 없이 추진하는 것도 그의 리더십이다. ‘신동빈 체제’가 롯데에 자리 잡은 지 3년이 채 안 됐지만 그가 그룹의 실질적 선봉장 역할을 해 온 것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 회장은 2004년 케이피케미칼을 시작으로, 2006년 롯데홈쇼핑(옛 우리홈쇼핑), 2009년 롯데주류BG(옛 두산주류BG), 롯데코엑스면세점(옛 AK면세점)을 인수했다. 2010년에도 편의점 바이더웨이, GS리테일 백화점마트 부문, 말레이시아 유화기업 타이탄, 중국 럭키파이, 필리핀 펩시, 파스퇴르유업 등 한 해 동안 11건의 굵직한 인수합병(M&A)을 성사시켰다. 2011년에는 하이마트도 인수하는 등 사업 다각화와 외형 확대에 있어 소리 없이 강한 리더십을 보여왔다.
신 회장은 기세를 몰아 ‘2018년 아시아 톱10매출 200조원 달성’이라는 야심 찬 계획도 내놨다. 이를 위해 최근 해외사업 현장을 자주 방문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