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권리를 제고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통계약’이라고 불리는 기존의 도급형태 계약 대신 일반적인 사업장에서 쓰이는 ‘표준근로계약’을 맺는 제작사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 그동안 좋은 영화 제작에 땀 흘리면서도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급여를 받는 등 열악한 현실로 고통받는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 및 변화가 기대된다.
◇노사정 이행협약 체결…JK필름, 명필름 등 ‘표준근로계약’ 적용
기존의 ‘통계약’은 촬영, 조명 등 각 파트별 팀장인 퍼스트가 자기 명의로 계약해 팀내 스태프에게 나눠주는 형태의 계약을 말한다. 특별한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일종의 도제식 도급계약으로서 갑과 을 관계에 따라 촬영 중단시 금액을 다시 돌려주는 등의 불이익도 많다. 촬영기간이 늘어나더라도 약정된 금액만 받아야 했고 4대보험은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표준근로계약’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영화산업노조가 체결한 협약에 따른 것으로 스태프 개개인과 개별적으로 맺는 단기계약이다. 보다 개방된 형태로서 임금은 월단위로 지급되고 4대보험을 적용되며, 일주일에 한번 휴식이 제공되는 등 최소한의 권리를 챙기도록 하고 있다. 때문에 그동안 지적된 촬영 강행군에 따른 노동력 착취 등의 문제가 상당부분 해소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4월 한국영화산업 노사정 대표는 ‘한국영화산업 제2차 노사정 이행 협약식’에서 ‘한국영화산업 노사정 이행협약’을 체결했다. 노사단체협약에 따른 표준근로계약서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롯데, CJ, 쇼박스 등 국내 거대 투자사들까지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홍태화 국장은 “단체협약은 제작가협회 및 협회 소속은 아니지만 협약에 위임한 회사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며 “처우개선을 위한 협약을 지키고 확장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JK필름은 이미 협약식 이전부터 표준근로계약의 체결을 고민하며 도입해 왔다. JK필름 대표인 윤제근 감독은 “해운대 촬영 때 4대보험과 시급계산 이슈가 있었다. 그래서 시도를 해보자고 해서 촬영·조명팀에 적용했다”며 “이 같은 변화는 당연한 것이고 진화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윤 감독은 “현재 촬영 중인 ‘국제시장’도 그렇게 하고 있다. 앞으로 준비하는 영화들도 그렇게 계약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명필름 역시 촬영에 들어간 영화 ‘관능의 법칙’에서 스태프들과 ‘표즌근로계약’을 체결했다. 명필름 정원창 피디는 “시간급으로 계약을 했고 4대보험이 적용된다”며 “계약서의 내용을 보면 하루 8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넘어서는 순간 수당이 지급된다. 스태프들의 만족도도 높다”고 설명했다.
◇스탭 인식 개선, 기존 방식과 조화 등 갈길 멀어
하지만 여전히 표준근로계약 방식을 적용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 같은 표준근로계약을 체결하는 제작사와 영화는 소수에 불과하며, 아직도 많은 수의 영화들이 통계약으로 체결되고 있다.
스태프들의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시간제 급여로 계산하다보니 영화 촬영이 짧아질 경우 오히려 총 액수가 줄어들어 통계약 방식을 고수하길 원한다. 이와 관련해 윤 감독은 “영화판의 스태프들은 대부분 기존의 방식대로 일해왔기 때문에 일반 직장의 계약 방식을 잘 모르고 있다”며 “의료보험도 직장에서 내는 것이 싸고 실업급여도 좋은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의 방식과 조화도 앞으로의 숙제로 남았다. 촬영이나 조명 등 각종 파트는 대부분 수장인 감독을 중심으로 팀을 짜고 있다. 실제 계약 당사자는 제작사와 개별 스태프지만 고용 및 근로감독 권한은 감독에게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파트별 감독들은 높은 연봉에 따른 세금을 피하기 위해 4대보험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팀원들은 표준근로계약이지만 감독은 통계약을 맺은 기이한 상황이 나오기도 한다.
아울러 시간제로 급여가 계산되다보니 시간과 비용 부담도 늘어났다. 정 피디는 “일단 표준근로계약을 시행해서 시간급대로 지급하면 전체적인 인건비 상승이 불가피하다”며 “비용이 상승하다보니 제작사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투자사에서 공감해야 가능한 상황이다”고 밝혔다.
아울러 표준근로계약을 시행 중인 미국의 경우 철저한 타임테이블이 짜여져 시간별 스케줄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이와 관련해 한국 역시 이런 ‘비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이어져 또다른 문제점을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