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재벌때리기’가 거세다. 경제민주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대기업의 경영권까지 흔들고 있다. 세습경영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자극해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의 전략이다. 국내 대기업들이 5년마다 반복되는 정치권 압박에서 자유롭기 위해선 국민들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 한다.
삼성, 현대차, SK, 두산 등 100년 안팎의 역사를 지닌 대기업 오너들은 후계구도를 어떻게 가져가고, 영원한 회사로 남을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깊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다.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 주식시장 상장기업의 절반 정도를 소유한 기업으로 150년에 걸쳐 5대째 세습경영을 하고 있지만, 스웨덴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 대기업’ 이다.
가족기업으로 장수하고 있는 또 다른 기업도 있다. 344년간 한 가족이 12대에 걸쳐 소유해 온 독일의 의약·화학 기업 머크다.
특히 머크가(家)와 회사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파트너위원회’의 프랑크 슈탄겐베르크 하버캄 회장의 얘기는 향후 100년을 넘어 지속가능한 회사로 남길 원하는 우리 대기업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최근 방한한 머크 독일본사 파트너위원회의 프랭크 스탄겐베르그 하버캄 회장은 지난 7일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식당 ‘한국의 집’에서 인터뷰를 갖고 가족 소유기업으로서 오랜 역사와 지속 성장을 이끌어온 전략을 소개했다.
그는 “(머크의 문화를 잘 아는)가족이라고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수한 외부인재를 영입하고 육성하는 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다”며 “유르겐 쾨닉 한국머크 대표와 같은 전문경영인도 그 사례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어 “가족간 의견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감독 역할을 맡는 파트너위원회의 비(非)가족 위원들을 통해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지배구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함으로써 오류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배경은 뭘까. 하버캄 회장은 “1920년대 들어 고위급 경영인을 외부에서 영입했는데, 가족 내에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모두 충족하는 데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현재 머크 가문 출신 중에 머크에서 일하는 것은 나와 사촌 2명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전문경영인이고요. 다른 기업에서 경력을 쌓고 충분한 능력을 인정받아야 머크의 경영인이 될 수 있습니다.”
130여 명 머크 일가는 각각 5% 이내의 지분을 갖고 있다. 대주주가 없다 보니 가족 간에 이견이 생기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의견일치를 볼 때까지 대화를 거듭한다고 하버캄 회장은 전했다.
하버캄 회장은 “젊어서 자동차를 사고 싶으면 자신이 직접 돈을 벌어서 사야 한다는 것 역시 머크만의 가풍”이라고 했다.
◇한국재벌도 변해야… 정부 지원도 필요= 머크 가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업을 우선시해 왔기에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도 ‘기업의 회생’을 위해 똘똘 뭉쳤다는 게 하버캄 회장의 얘기다.
머크가의 이같은 모습은 삼성, 현대차 등 가족경영 형태를 고수하는 한국 재벌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버캄 박사는 “독일의 경우에 1, 2차대전 등 커다란 전환점 이후에 변화하려는 의식적 노력을 했다”며 “한국 기업가도 변화 의지를 갖고 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바꿔야한다”고 말했다.
“기득권만 유지하려 하면 변할 수 없습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진 않겠지만 그들 스스로의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머크가 균형잡힌 운영체제를 만들기 위해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공들여 다듬어 왔다”고도 했다.
하버캄 회장은 머크가 오랜 세월을 가족 기업으로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정부의 지원도 한몫했다고 밝혔다. 하버캄 회장은 “독일 정부가 과도한 상속세로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는 사태를 막아줬다”고 했다. 지분을 물려받으면 보통 10%에 해당하는 상속세가 부과되지만, 상속 이후 10년간 고용이나 총임금을 현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하면 상속세가 유예된다는 것.
그는 “독일에선 고용을 10년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면 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며 “이는 독일의 현명한 세법으로 가족기업 승계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세제 혜택 덕분에 최근 같은 경제 위기에서도 독일의 가족기업은 더 안정적”이라며 “독일 GNP 80%가 가족기업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현재 한국에서 재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 않다는 데 대해 그는 “기업의 이익을 주주가 빼가지 않고 최상의 사업에 재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지배구조의 유형에 특별한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버캄 회장은 “가족 기업의 힘은 연속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분기별 실적이나 당장의 이익보다 100년 앞을 보고 지속가능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