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레지던트 2년차로서 소화기내과에 있을 때였다. 깡마른 체구에 키는 160이 조금 넘었으며 체중은 40kg가 채 안됐다. 병마는 그의 얼굴에 역력한 흔적을 만들어 퀭한 눈에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의사들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췌장암 말기...이제 몇 개월 뒤 삶의 끈을 놓아야 되는 그였다. 이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요...”가슴이 아리다. 그리고 화가 났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가 이제 핏덩이 의사인 나에게 항상 가혹한 채찍을 댔으니 말이다. 다른 환자들처럼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적어도 나에게 수고한단 말 한번 꺼내기 그렇게 힘든가? 내가 다가서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그에게 난 조금 더 다가서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 와의 불편한 시간들이 지속되고 있던 중 그가 피를 토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희미한 삶의 불씨를 태우고 있었다. 반대편에 중심정맥관을 추가로 삽입하고 혈액과 수액을 투여했으나 혈압이 잡히지 않고 그의 의식은 흐려지고 있었다.
“기도삽관 준비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만하시죠...보내줘요”. 그가 거부했지만 난 차가운 튜브를 그에 기도에 밀어 넣었다. 그의 깡마른 손은 내가 넣은 튜브를 빼려 몸부림 쳤다. 난 그의 애처로운 손짓을 뒤로 하며 안정제를 투여했다. 다음날 다행히도 신께서 그에게 삶의 말미를 주셨는지 안정제를 끊자 그는 눈을 떴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희미한 빛 속에서 날 보고는 웃었다. 어린 동생의 치근덕거림을 받아주는 형처럼...나 또한 미소로 답했다.
다음날 새벽 1시쯤 중환자실 간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대변에 피가 섞여 나오고 혈압이 자꾸 떨어지며 맥박이 상승한다는 전화였다. 그는 날 보자 마디마디가 다 드러난 야윈 두 손을 애처롭게 흔들었다.
“튜브 안 뽑으실거죠? 팔 풀어드릴 테니 여기에 하고 싶은 말 적으십시요”라고 말하며 그에게 종이를 건넸다. 그는 야윈 손으로 떨면서 두 글자를 써내려갔다. “아들...” 난 그의 아내에게 남편분이 위험하니 중환자실로 오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가 써내려간 아들이란 두 글자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아드님 보고 싶어 하시는데 어디계시죠?".
아내는 눈물을 쏟으며 말을 이었다. “군대에 있어요”
그의 마지막 소원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아들이 근무하는 부대 주소를 받고 전화를 걸었다. 부대의 당직사관에게 부탁 아니 사정을 했다. 난 몇 시간 남지 않았고 이제 의사로서 버티어 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예! 보내드리겠습니다. 부대에 있는 차로 빨리 달리면 4~5시간 정도 걸립니다”
4~5시간?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그 많은 혈액제제와 수액제제를 그가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아들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의학적인 판단이 섰다. 하지만 그는 그 앙상한 몸으로 내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듯 잘 버텨냈다. 드디어 오전 7시경에 군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아들이 중환자실에 들어왔다. 아들의 모자 밑 가리워진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요” 그의 아들에게 말을 전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글을 남겼다.
“의사...수고...음료수...” 그리고 그의 손가락은 날 향했다.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음료수라도 사주라는 글을 남겼다. 가슴속에 무언가 뭉클하게 끓어오르며 매운 고추냉이를 씹어 삼키는 듯 코끝이 아리고 이내 눈물이 났다. 그에게 인정받지 못해 서러웠던 감정들과 마지막 시간을 힘들게 보냈을 그에게 따뜻한 말은 커녕 볼멘소리를 같이 했던 그 미안함이 이 시큰거림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두 번 저었다. 괜찮다는 말이었으리라. 그렇게 그를 보냈다. 송영득님...항상 당신의 아픈 모습만 보았습니다. 이제 죽을 때까지 당신을 괴롭히던 병마의 고통을 놓아두고 편히 쉬세요. 이 못난 의사는 항상 당신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