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2008년 4분기, 삼성전자의 실적 발표는 시장을 충격에 빠뜨렸다. 대한민국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는 분기별 실적 집계를 시작한 2000년 이후 처음으로 9400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적자의 60%가량은 당시도 세계 1위였던 메모리 반도체(5600억 원)에서 나왔다.
삼성전자는 ‘초(超)격차’ 전략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이건희 선대회장 시절, 삼성 반도체 사업을 이끌었던 권오현 삼성전자 고문은 자신의 책 ‘초격차’에서 “초격차는 비교 불가한 절대적 기술 우위와 끊임없는 혁신, 그에 걸맞도록 구성원들의 ‘격(格)’을 높이는 것”이라고 적었다.
지난해 10월 27일 이재용 회장 취임 당시, 삼성전자는 글로벌 경기침체에 따른 반도체 업황의 부진으로 어둡고 긴 터널에 막 진입한 상황이었다. 이후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서 조 단위 적자를 내는 등 유례 없는 위기에 빠졌다.
반도체를 둘러싼 불확실성의 증가로 위기가 지속되고 있지만, 이재용 회장은 ‘기술’로 정면 돌파하겠다는 경영철학을 수차례 강조해왔다. 이재용 회장은 취임 1주년을 일주일 여 앞둔 19일 삼성 반도체 사업이 태동한 기흥캠퍼스를 방문, ‘반도체 초격차’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메모리·파운드리·팹리스시스템반도체 등 반도체 전 분야에 대한 경쟁력 제고 방안을 논의했다.
이재용 회장은 “대내외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다시 한번 반도체 사업이 도약할 수 있는 혁신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며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술 리더십과 선행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해 복권 이후 첫 공식 행보 때도 기흥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기공식에 참석했던 이 회장이 취임 1주년을 앞두고 또 다시 기흥캠퍼스를 찾은 것은 반도체 사업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흥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는 2030년까지 약 20조 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삼성의 주력 사업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체 수출을 책임지는 국가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다. 글로벌 패권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경제·안보동맹의 중요한 연결고리다.
미국은 지난해 첨단 반도체 또는 반도체 제조 장비의 중국 수출을 전면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대중국 수출 차단을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대중국 수출 규제 국면에서 미국은 한국, 일본, 대만에 이른바 ‘칩4 동맹’을 제안하는 등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주도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이 중요한 시점마다 반도체 사업을 직접 챙기는 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술 격차를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한국이 ‘반도체 강대국’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데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삼성 반도체 사업 미래를 위해 메모리 ‘초격차’ 유지와 함께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을 더 키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규복 반도체공학회장은 “인수합병(M&A)이나 지분 인수 등을 통한 전략적 협력 관계를 통해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키워가야 한다”며 “AP와 이미지센서 등 대형 아이템뿐 아니라 다양한 시스템반도체 분야를 공략하면서 실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삼성 반도체가 살아나기 위해선 우선 메모리 반도체 회복이 필요하다”며 “파운드리 부문은 고객에 대한 신뢰 확보가 마련돼야 TSMC와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