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재계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반도체 사업 등을 논의하기 위해 7일 네덜란드로 출국한다. 이 부회장은 18일까지 약 2주간의 해외 출장 일정 중 첨단 반도체 생산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네덜란드 ASML 본사를 들러 경영진들과 사업 논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EUV 장비는 품귀현상이 빚어질 정도로 공급자 우위 시장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에서 세계 1위인 대만의 TSMC를 추격하며 기술경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선 고성능 EUV 장비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앞서 이 부회장은 2020년 10월에도 EUV 장비 확보를 위해 직접 ASML 본사를 찾아 페터르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 등을 만나 파트너십을 다졌다.
재계에선 사법리스크로 경영활동에 제약을 받는 이 부회장이 직접 나선 것은 ‘초격차’를 유지 중인 반도체 부문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으로 관측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을 시작으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 펫 겔싱어 인텔 CEO 미팅, 삼성 호암상 시상식 참석 등 적극적인 대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면서 "2030년 파운드리 시장 1위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만큼 이 부회장의 향후 행보가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향후 5년간 반도체ㆍ바이오, 신성장IT 등에 450조 원을 투자한다. 전체 투자액의 상당액을 반도체 부문에 투입할 것으로 알려진 만큼 이번 대규모 투자 계획은 삼성전자의 미래를 결정할 디딤돌이 될 전망이다. 이 부회장은 “목숨 걸고 (투자) 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재계는 이 부회장과 갤싱어 인텔 CEO의 최근 만남도 주목하고 있다. 인텔은 미국 시스템반도체 업계 최대 기업으로 전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삼성전자와 1, 2위를 다투고 있다. 이 부회장이 겔싱어 CEO와 차세대 메모리, 팹리스(반도체 설계)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는 이번 회동이 양사가 경쟁관계에서 미래 동반자로의 전환이 빨라지는 것을 의미하며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최강자가 되기 위한 삼성전자의 '윈-윈 전략으로 해석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글로벌 무대에서 기술력만큼 파트너십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면서 “이런 측면에서 이 부회장의 역할론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 선행기술 연구개발(R&D)을 담당하는 조직인 반도체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례적인 보직 인사와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통상 삼성전자는 매년 한 차례 연말 정기 인사와 조직 개편을 실시한다. 업계에선 위기론이 제기되는 반도체 사업부의 분위기 쇄신을 위한 인사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신임 반도체연구소장은 삼성전자에서 낸드플래시 개발을 주도한 송재혁 플래시개발실장(부사장)이 맡는다. 메모리 기술 담당 조직을 세분화해 D램 TD실장은 박제민 부사장, 플래시 TD실장은 장재훈 부사장이 각각 선임됐다. 신임 파운드리 제조기술센터장에는 남석우 DS부문 CSO 및 글로벌 제조·인프라총괄 부사장이, 파운드리기술혁신팀장에는 김홍식 메모리제조기술센터 부사장이 각각 선임됐다.
이 부회장의 이번 유럽 방문에서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던 삼성전자의 인수·합병(M&A)과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가 나올지도 관심사다. 유럽에는 인피니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NXP 등 반도체 업체가 많다. 한종희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은 지난달 말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대형 M&A 작업이 진행 중이며 조만간 결정될 것이라는 취지로 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