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강과 아열대의 숲들, 열대 우림, 산과 바다, 습지와 개펄, 마을, 심지어 도시와 사막에 대략 8600여 종의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사랑을 나누며 번성한다. 새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에 산다. 새들은 아침저녁으로 우리가 사는 집의 울타리나 창 밖 나무에 날아와서 노래하며, 회색빛 일상에 기쁨과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우리는 까치, 직박구리, 참새, 박새, 멧비둘기 같은 새들이 지저귀는 노래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저녁에는 둥지를 찾는 새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든다.
무려 1억 5000만 년 전에 지구를 찾은 이 진객들은 몸이 깃털로 덮이고 날개를 가진 작고 우아한 척추동물이다. 새들은 인류보다 앞서서 지구에 왔다. 이들은 작고 나약하지만 영리한 종으로 진화하는 데 성공한 최고의 전략가들이다. 새들은 영롱한 소리로 노래하는 명가수이고, 공중을 자유자재로 활강하는 솜씨를 뽐내는 비행술의 대가이며, 우아한 깃털을 펼치며 춤추는 훌륭한 무용가들이다. 그런가 하면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이고, 구애와 짝짓기에 목숨을 거는 사랑꾼이며, 아무 죄의식 없이 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는 방탕한 바람둥이다. 또한 육아의 부담을 암컷과 수컷이 똑같이 나누는 성 평등주의자이며,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거침없이 투신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새들이 늘 명랑하게 노래하는 것은 천부의 낙천성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새들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산다. 지금 이 순간의 놀라운 행복을 만끽하며 산다. 이들은 제 나약함에 실망하지 않고, 생의 유한성이나 죽음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을 테다. 오직 짝짓기 상대를 찾아 움직이고, 새끼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며, 더 좋은 서식 환경을 찾아 이동한다. 조류학자이자 작가인 필리프 J. 뒤부아와 엘리즈 루소는 새를 가리켜 “아주 오래된, 작은 철학자”라고 하는데,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새의 기원이 공룡이나 고대 파충류인 정룡류일 것으로 추정한다. 새의 조상인 시조새는 파충류와 여러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새들은 화려한 깃털과 매끈한 유선형의 몸통을 가진 아름다운 쪽으로 진화한다. 암컷이 더 멋진 깃털을 가진 수컷을 선호한 탓이다. 조류의 암컷은 번식 시기에 화려한 깃털을 가진 수컷의 생존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더 아름다운 수컷을 짝짓기 상대로 선택한다. 새들에게 아름다움은 진화를 촉진하는 더 우월한 선택지이다. 어쨌든 공룡에서 시작해 압축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 매끈한 몸통과 매혹적인 깃털을 가진 새가 나왔다는 사실은 놀랍다.
사랑스럽고 호기심 많은 새의 활동 영역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철새들은 자기장을 인식하고, 별과 태양과 달의 변화를 감지하는 특별한 감각을 이용해 수만 킬로미터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동한다. 극제비갈매기는 북극에 둥지를 틀고, 시베리아에서 북유럽에 걸친 한대 지역에서 서식하는 종이다, 여름이 끝나면 겨울을 나려고 1만 2000㎞를 날아서 남쪽 바다로 이동한다. 이 새는 한 해에 9만㎞를 이동한다. 20년을 사는 동안 지구와 달 사이를 두 번 이상 왕복하는 거리를 여행하는 셈이다.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찾아 해마다 수만 킬로를 이동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극제비갈매기는 경이로운 존재다.
우리는 새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는 새들에게 죽는 법을, 그리고 더 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수명이 다해도 온갖 연명 치료로 생명을 연장한다. 하지만 새는 때가 되면 조용한 곳에 몸을 숨기고 죽음을 맞는다. 새들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온전히 현재를 누리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새들은 숭고하기조차 하다. 새들은 자연환경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다양한 감각과 경험들로 충만한 삶을 살다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사지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서도 요양병원에 들어가 몇 년씩 가망 없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큰 비용을 지불하는 인간과 순리대로 흘러가는 생명의 순환 속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새들은 비교해 보라.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유예하며 미래의 행복에 투자하는 인간과 오직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제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새들! 누가 더 지혜로운 존재인가?
새가 죽는 일은 특별하지 않다. 필리프 J. 뒤부아와 엘리즈 루소는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에서 “자연 속에서 최후의 순간은 언제나 짧다.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쇠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들의 세계에서, 삶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이다”라고 썼다. 자연 수명을 다 누리는 새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짧은 생을 마치는 새들이 더 많다. 새를 노리는 것은 맹금류 같은 포식자지만 그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모든 지구 생물의 안전과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포식자이자 유해 동물이다. 한국의 경우 해마다 투명 방음벽이나 건물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 야생 조류가 800만 마리다. 미국은 6억 마리(다른 통계는 3억 9000만에서 10억 마리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캐나다는 2500만 마리가 죽는다고 한다.
새의 멸종 위기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17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는 한국의 고전음악 애호가들이 가장 즐겨 듣는 곡 중 하나다. 비발디는 새의 지저귐, 시냇물, 태풍, 비, 바람 소리를 재현한 바이올린 연주로 사계의 아름다움을 들려준다. 최근 ‘사계 2050-더 [언서튼] 포 시즌스’(The [uncertain] Four Seasons)는 기후 변화 시나리오와 인공지능 기술을 합성해 만든 2050년 버전의 ‘사계’를 시연했다. 놀라운 것은 새로운 버전의 ‘사계’에서는 새 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현재 속도로 온실가스 배출과 환경오염, 기후변화가 지속하는 것을 전제한다면 2050년에는 새가 멸종될 것이라고, 인공 지능은 예측한다. 지구에서 새가 사라지다니!
아름다운 6월의 저녁 먼 산에서 울던 뻐꾸기 울음소리를 더 들을 수 없다면 인류에게 그보다 더한 재앙은 없다. 새들의 운명은 인류에게 올 미래를 예시한다. 과학자들은 지구 생물종 대멸종의 시기가 다가온다고 경고한다. 기후 위기와 지구 온난화, 인간에 의한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 파괴로 새의 서식지들이 줄었다. 그 결과로 새의 개체가 줄고 있는 중이다. 지구에서 새들이 사라진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먼저 식물이 영향을 받고, 곤충과 동물들이 차례로 떼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런 지구에서 살아남을 생물은 단 한 종도 없다. 상상조차 끔찍하지만 지금 자연이 보내는 여러 경고를 무시한다면 불과 서른 해쯤 뒤면 새의 멸종은 자명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사태는 연쇄적으로 다른 생물종의 멸종을 불러오고, 지구 생태계는 죽음의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이 암담한 예측이 진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질 생생한 현실로 펼쳐질 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