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실손보험의 유토피아

입력 2020-12-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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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료는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되는 사안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보험업계가 내년에 실손보험료를 20% 인상한다’는 조치에 대한 질의에 이같이 답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말을 추가로 덧붙였다. “실손의 가입자는 3800만 명으로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공공적인 성격을 고려해 보험업계에서 합리적인 가격을 설정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했다.

엄밀히 보면 ‘사보험’ 시장에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뒤로 빠진 모습도 아니다. 정부는 매년 늘 이렇게 애매한 입장으로 가격에 일부 개입하고 실제로 실손보험료 인상 폭도 일부 통제된다.

한국에서 사보험 시장은 건강보험을 앞지른 지 오래다. 전 국민이 가입되는 건강보험의 보장수준이 60%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공적 건강보험이 개인의 위험을 전혀 뒷받침할 수 없다는 인식 자체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사보험을 ‘필수적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근거로 활용된다.

사보험 시장은 국가 보험에 대한 신뢰도와 역의 관계를 갖는다. 그렇게 사보험을 선택한 이들이 금융위원장의 말대로 3800만 명에 육박한다.

독일은 10% 수준으로 일정 소득 이상 근로자나 자영업자에 한해 사보험을 선택한다. 네덜란드나 프랑스도 공적 건강보험기금이 모든 국민을 떠받치고 있고 사보험은 굳이 가입하지 않아도 되거나 일부만 손을 댄다. 사보험은 필수가 아니기에 동시에 정부의 ‘가격 통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부가 사보험의 가격을 일부 통제한다는 것은 보험사가 대다수의 실손보험 가입자에 대해 공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공적 보험이 할 일을 사보험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스스로 국가의 공적보험 인프라를 확보하지 않은 책임을 되묻지 않는다.

정부는 대신 최근 4세대 실손보험을 발표했다. 보험료를 청구하지 않는 이들에게 보험료를 깎아주겠다며 홍보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기존의 실손보험을 탈퇴해 4세대에 가입하라고 완전히 권유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빨리 가입해야 이득”이라는 보험업계의 말처럼 4세대는 그저 가입을 미루고 미룬 사람들이 잡아야 하는 유일한 선택지에 불과하다.

유토피아를 상상해 본다면, 다음 세대의 실손보험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더 이상 실손보험 가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공보험으로도 국민 여러분의 의료서비스 부담을 확연히 줄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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