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재개발 없는 공급 정책 제한적… 도심 고밀 개발 어쩔 수 없는 선택
수급 불안으로 빚어진 집값 상승을 풀어가는 해법은 결국 공급 대책이었다. 전문가들은 고밀 개발로 서울 도심 내 주택 공급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정책 중 향후 10년간 주택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정책(중복 응답 가능)’을 묻는 이투데이 설문에 건설·부동산 분야 전문가(총 29명)의 86.2%가 공급 정책을 꼽았다. 교통 정책과 세제 정책을 꼽은 전문가는 각각 37.9%, 금융 정책을 선택한 전문가는 20.7%였다. 교통 정책은 공급 대책의 보완책이고 현 금융·세제 정책이 부동산 수요 억제 방안으로 쓰이는 것을 감안하면 전문가는 결국 공급 확대 정책이 힘을 낼 것으로 본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 동안 정부는 수 차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주택 공급 정책을 발표했다. 올해 8월 발표한 ‘서울 권역 등 수도권 주택 공급 확대 방안(8·4 대책)’까지 합치면 2028년까지 수도권에 128만 호 이상을 짓기로 했다. 서울 용산구 용산역 정비창과 서초구 서울지방조달청 부지 같은 금싸라기 땅도 택지 후보지로 들어갔다.
임병철 부동산114 수석연구원은 “주택시장이 안정되려면 일정 기간 동안 일정 수준 이상 주택 공급이 이뤄져야 하고 그에 따라 가격이 등락한다”며 “128만 호가 정부 계획대로 시세보다 낮게 시장에 공급된다면 매매가격이나 전세시장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고준석 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도 “주택 공급은 많으면 많을수록 시장 안정에 도움을 줄 것”이라며 “정부가 발표한 만큼이라도 주택이 시장에 공급된다면 부동산 가격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점쳤다.
공급 정책의 파급력을 크게 평가하면서도 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김인만 김인만부동산연구소장은 “양도소득세·종합부동산세 강화 같은 수요 억제 정책은 시장 상황이 변하거나 차기 정부가 출범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며 “그에 비해 공급 정책은 한번 시작하면 수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김 소장은 “정부가 급한 마음에 공급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향후 시장 상황이 가라앉으면 미분양 물량이 크게 늘 수도 있다”며 “공공 분양 같이 정부가 컨트롤(조절)할 수 있는 물량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수도권에선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이 부동산시장 변수로 떠오를 것으로 봤다. 이번 설문조사에 응한 전문가 가운데 89.7%가 ‘향후 10년간 서울 및 수도권 주택시장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칠 요인’으로 정비사업을 꼽았다.
지난해 기준으로 준공 후 20년이 넘은 노후 아파트는 수도권에서만 2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수도권 전체 아파트 가운데 절반 이상이다. 준공 후 30년이 넘은 아파트도 49만 채에 이른다. 그동안 정부와 수도권 지방자치단체에선 재건축 등에 소극적이었다. 새 아파트가 공급되는 과정에서 주변 집값까지 끌어올릴 것이란 걱정에서다. 정비사업 속도가 늦어지면 노후주택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올해 공기업 참여, 공공주택 기부채납을 조건으로 규제를 완화하는 공공 재개발·재건축 제도를 도입, 정책 방향을 일부 수정했지만 아직 시장 반응은 미지근하다. 정부가 정비사업 공공성을 확보하겠다며 내건 조건이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게 정비사업장 분위기다.
서진형 대한부동산학회장(경인여대 교수)는 “매년 서울에선 12만 가구, 수도권에선 30만 가구가 필요하다는 게 학계의 보편적 인식”이라며 “외곽 지역에 조금씩 공급하는 방식으로는 주택 수요를 채우기 힘들다”고 말했다. 서 회장은 “주거 수요가 많은 서울 도심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을 고밀 개발하는 방식으로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도심 개발 방식을 전환해야 할 것도 주문했다. 설문에 참여한 모든 전문가가 고밀·복합 개발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수도권에서 주택을 지을 수 있는 유휴지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태에서 주택 공급을 지속하려면 더 높이 짓거나 여러 기능을 갖춘 복합시설로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 등에선 이미 관공서나 교통시설 등을 복합 개발해 주택을 공급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주택 가용지가 부족해지는 상황에서 주상복합건물이 늘어날 것”이라며 “도심 고밀 개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