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은 지도에서 사라질 뻔했다. 개전 사흘 만인 6월 28일 서울이 점령당하고 한강대교가 폭파됐다. 다행히 유엔연합군이 7월 8일 전쟁에 투입된다. 낙동강 부근까지 패퇴했던 연합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한다. 하지만 11월 28일 국경을 넘은 대규모 중국군에 밀려 다음 해 1월 4일 서울을 또 뺏겼다. 3월 15일 서울 탈환 이후 오랜 공방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37개월간의 전쟁은 참혹했다. 한국군 전사 13만7000여 명과 부상·실종 등 48만여 명 등 62만 명이 살상당했다. 자유진영 16개국의 전투병력과 5개국 의무지원단 34만여 명이 참전한 유엔군은 전사 5만8000명을 포함해 15만5000명이 피해를 입었다. 미군만 5만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한 민간인도 37만여 명이 죽었고, 61만여 명이 부상·납치·행방불명되는 등 99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국가기록원).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은 그렇게 지켜졌다. 산업시설도 폐허로 변한 암흑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섰다. 전쟁이 멈춘 1953년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로 세계 최빈국이었다. 작년 3만2115달러로 480배 불어났다. 경제규모(명목GDP)는 13억 달러에서 1조6422억 달러로 1200배 이상 커져 세계 12위에 올랐다. 정치적 격변과 경제위기 등 많은 고난을 이기고 민주화와 경제적 성공을 함께 이뤘다. 세계사의 유례없는 기적이다.
6·25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으로 3대 세습한 북한 정권은 지난 70년간 한순간도 남한에 대한 공격을 멈춘 적 없다. 긴장 완화와 전쟁 종식을 위한 노력은 꾸준했다. 1972년 박정희 정부의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노태우 정부의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 정부의 2000년 ‘6·15 공동선언’, 노무현 정부의 2007년 ‘10·4 공동선언’,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018년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선언’이 나왔다. 모두 화해와 협력의 길을 열고, 군사적 적대행위를 끝내자는 합의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북은 계속 거꾸로 갔다. 남북협력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이래 북에 대한 돈퍼주기였다. 북의 핵무기 고도화로 우리 국민의 생명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까지 온 게 그 결과다. 북은 하인 부리듯 우리를 길들이면서, 달라는 대로 주지 않으면 약속 문서를 휴지로 만들고 대립의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문 대통령도 지난 3년간 남북관계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한반도 운전자론’으로 어떻게든 북의 비핵화와 화해·협력의 돌파구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김정은과의 세 차례 만남도 허망한 무위(無爲)로 돌아가고 있다. 모든 선의는 무시되고 합의 또한 파기됐다. 북은 관계 개선의 상징인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서울 불바다’ 운운하면서 군사적 적대행동에 나섰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문 대통령에 쏟아낸 조롱과 막말, 남한에 대한 능멸적 언사는 옮기기조차 민망하다. 새삼스럽지 않다. 지금까지 되풀이되어온 그들의 실체다.
대한민국의 존엄이 땅에 떨어졌는데도 북에 대한 굴종을 계속 주장하는 이가 많다. 더 비극적인 건 6·25전쟁과 이후 우리 역사가 왜곡되고 부정당한다는 점이다. 지금 정권의 현대사 인식은 ‘친일에서 반공, 산업화 세력으로 이름만 바꿔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사이비 보수가 척결대상’이다. 역사의 맥락과 성공의 가치가 뒤집어졌다.
그리하여 걸출한 독립운동가였으되 남침의 전범(戰犯)인 김원봉을 추앙하고,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은 일본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매도된다. 70만 군대를 보내 이 땅을 유린한 중국이 지금도 북의 변함없는 뒷배를 자처하는데 우리는 그들과 공동운명체라고 한다. 이 나라 안보를 지탱하는 미국과의 동맹은 반미(反美)를 훈장으로 삼는 주류세력에 의해 파열음만 커진다. 진실을 외면하고 착각이 옳다고 우기는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의 역사 부정으로 어찌 바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나. kunny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