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거래 통해 가격 생성 가능…스타트업으로 자본 이동 기대
지재권 보호 넘어 가치 창출…특허 빅데이터 활용 R&D 지원
일본 수출규제 계기 대통령 보고, 500여개 소부장 과제 적용키로
"2020년 12월을 전후로 대한민국 지식재산 시장의 역사가 달라진다. 과거에는 침해의 역사였다면 이제는 거래의 역사가 될 것이다"
과거에는 무규율의 약탈적인 기술침해가 난무했다면 이제는 질서 있는 아이디어의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 기업들이 서로의 지식재산 가치를 존중하게 되고 특히 스타트업은 자기의 권리를 충실하게 보호받아 성장할 수 있는 세상.
박원주 특허청장이 꿈꾸는 세상이다. 반년 후면 이 꿈은 망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지난 9일 정부대전청사 특허청 그의 집무실에서 만난 박 청장은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띠며 중소기업의 숙원이던 '특허 침해 손해배상액 현실화'에 대해 이 같은 소감을 밝혔다. 조용한 어조였지만 '해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깊게 배어 있었다.
이는 2018년 9월 박 청장의 취임 일성과 맥을 같이 한다. 당시 박 청장은 "국민과 기업이 만들어낸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은 지식재산으로 확고하게 보호해 애써 일구어낸 선도형 기술격차가 추격당하지 않도록 지켜줘야 한다"며 "지식재산의 보호는 궁극적으로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지식재산이 보호받지 못하면 혁신도 없다"고 강조했다.
1년 9개월을 쉼 없이 달려 3개월 남짓의 임기밖에 남지 않았지만 박 청장은 여전히 지식재산의 정당한 가치 인정과 특허청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지식재산이 제값 받는 시장이 활성화되는 것과 일본 제국주의 잔재로 여겨지는 '특허'가 일반인에게 어렵고 권위적 사고를 지니고 있어 이를 해소해 국민 인식을 높이기 위한 특허청 명칭 변경 추진 등이 그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특허권 보호 체계 갖춘 나라 되다 = 특허청은 지난해 7월 특허법과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을 일부 개정해 특허권침해 시 3배를 배상토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했다.
손해배상액이 많지 않아 침해를 통해 이익을 얻고 사후에 보상하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박 청장은 "큰 기업은 특허를 침해하는 게 당연한 의사 결정이었다. 특허 침해로 얻는 이익이 소송에 져서 이뤄지는 배상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라며 "이는 대기업이 나쁘고 중기가 선(善)이어서 기술탈취, 특허침해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법제와 법적 관행이 기술탈취가 응당 해야 할 올바른 의사 결정이라고 우리 기업들에 가르쳐준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3배 배상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령 어떤 기업이 특허를 가지고 있는 100개의 물건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면 특허권 침해자가 1만 개의 침해 제품을 판매해도 특허권자의 생산능력인 100개를 넘어서는 9900개의 제품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3배로 계산해도 마찬가지였다. 9700개의 특허권 침해 제품에 대해서는 배상받을 길이 없었다.
박 청장은 고민했다. 이런 불합리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배수를 적용하면 안 된다 생각했다. 침해해서 번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자라는 생각이 '특허 침해 손해배상액 현실화'의 특허법 개정안 추진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1년 내내 이 일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좌절했다. 법원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실제 입은 손해만큼만 배상해야 한다는 '실손보존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박 청장은 "법원도 특허 침해에 대해 보상이 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법의 법리와 맞는 걸 가져와 달라고 얘기하더라.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실시료(로열티) 배상이었다"고 설명했다.
특허를 가진 기업과 특허를 침해한 기업이 적절한 절차를 밟고 협상을 했다면 최소한의 로열티를 배상해야 한다. 법원은 특허 침해로 인한 기회비용을 손해로 인정했다. 통상 특허 침해자의 이익의 10% 정도다.
박 청장은 "지난달 20일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 날 특허권자의 생산능력을 초과하는 특허침해자의 제품 판매에 대해서도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특허법 일부개정안이 통과돼 오는 12월부터 시행된다"고 말했다.
이번에 개정된 손해액 산정방식과 특허침해에 대한 3배 배상을 함께 운영하는 나라는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두 번째로 이를 모두 명문화한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박 청장은 "손해배상체계의 기본골격이 완성됐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특허권 보호 체계를 갖출 수 있게 됐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그가 내다본 것은 지식재산의 보호를 넘어 가치 창출이다.
박 청장은 "이제는 특허에 대해서 가격이 형성될 수 있게 됐다. 거래가 이뤄질 거다. 거래가 되면 가격이 생기기 때문에 그 가격을 바탕으로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이 특허를 은행에 맡겨 돈을 빌리기가 쉬워진다"며 "이는 지식재산을 통해 초기 자금을 확보하려는 스타트업을 살리는 생산적인 자본의 이동을 불러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손해액의 현실화로 권리자에게 돌아가는 손해배상액이 자연스럽게 증액되면 지식재산의 가치가 시장에서 제대로 인정받아 지식재산을 매개로 한 기술거래와 금융거래가 활성화되고 기업도 용이해진 자금 유동성 확보를 통해 후속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등 지식재산을 매개로 한 가치 창출의 선순환 구조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통령 보고 통해 얻어낸 소·부·장 중대형 과제 특허 빅데이터 분석 의무화 = "특허청이 가진 막대한 데이터를 활용해 산업 정책에 기여를 해보자" 시작은 이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박 청장 취임 당시 특허 건수는 4억 건. 1년 반이 조금 넘은 시간 동안 8000만 건이 더 늘었다. 5억 건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다.
지금까지는 어떤 기술 연구를 할 때 전문가가 'OO을 연구해야 됩니다'라고 말하면 정부가 심의해서 그 기술에 대해 예산을 투입, 연구가 시작된다. 문제는 이 연구과제 기술이 선점되고 있는지 혹은 기술 개발의 필요성이 있는지이다. 이를 사전에 특허로 분석하면 최소한 권리가 되는지 알 수 있고 어떤 부분의 연구개발(R&D)이 필요한지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선점된 기술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R&D를 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다. 또 이미 기술이 선점됐을 때 연구의 내용을 바꾸는 지도 역할도 가능하다. 연구의 내용을 바꿔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기존의 특허를 비껴갈 수 있게 하고 기존의 특허와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찾아낼 수 있도록 연구의 내용과 과정을 바꿔 줄 수 있다.
이 역시 시작은 쉽지 않았다. 특허 빅데이터 분석을 각 부처에 주면 달갑게 받지 않았다. R&D 예산이 더 들고 인력·시간도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일본 수출규제가 터졌다. 일본 기술로부터의 독립이 시급한 국가과제가 됐다. 박 청장은 문재인 대통령 보고를 통해 특허 빅데이터 활용을 역설했다.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박 청장은 "올해 500여개의 소·부·장 중대형 과제 모두 다 특허 빅데이터 분석을 달기로 했고 그 비용은 특허청과 각 부처가 반반씩 부담하는 것으로 정해졌다"며 "목표는 소부장만이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의 모든 R&D에 특허 분석을 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인 박 청장은 "이로 인해 (일본 수출규제로) 가뜩이나 힘든 산업부 후배들을 더 힘들게 했지만 지금은 산업부에서 우리와 협업할 것이 없는지 물어보는 상황으로 변했다"며 부처 협업의 발전 사례를 들었다.
◇ 특허청을 '지식재산혁신청'으로 = 박 청장이 아쉬워하는 부분은 특허청의 명칭 변경 실패다. 특허청은 기관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 '특허'가 일반인에게 어렵고 권위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며 명칭변경을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했지만 20대 국회가 막을 내리면서 성공하지 못했다.
박 청장은 "특허라는 용어는 일반인에게 어렵고, 혁신기술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국가로부터 허가받아야 한다는 권위적 사고가 담겨 있다"며 "세계 많은 나라가 '지식재산청'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고 특허청이라는 이름을 쓰는 국가는 일본과 한국뿐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특허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특허를 부여하는 기관'에서 '지식재산을 기반으로 국가혁신을 주도하는 기관'으로의 전환으로 국민이 응당 받아야 할 지식재산 서비스의 질적 강화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박 청장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이후 협의는 차기 청장이 해야겠지만 부처 간 이견이 있는 부분은 충분한 협의를 통해 결과를 도출해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