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둘 둘’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타 먹는 커피가 대세이던 시절 커피·설탕·크림의 비율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1990년대 초까지도 기업의 여자 직원들은 상사나 회사 방문객의 커피를 탔다. 심지어 ‘자기계발 교육 프로그램’이란 이름하에 ‘커피 잘 타는 법’을 가르치는 회사도 있었다. 그러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거치며 타 먹는 커피 대신 커피믹스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구조조정으로 여직원들이 해고된 영향이 컸다. “커피믹스는 수많은 ‘미스 김’”이라는 말은 당시 만연했던 직장 내 성차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카페 한 곳을 지나 1분 정도 걸으면 또 다른 카페가 나올 만큼 원두커피를 선호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그래도 나른하고 피곤한 오후엔 봉지 커피를 뜯는 이들이 많은 걸 보면 커피믹스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지 싶다. 그 인기만큼이나 외모도 여러 번 바뀌었다. 직사각형에서 스틱형으로 변하더니 지금은 설탕 양 조절은 물론 뜯기도 훨씬 쉬워졌다. 이 순간 스틱형 봉지 커피를 재치 넘치게 표현한 이환천의 시 ‘커피믹스’가 떠오른다. “내목따고 속꺼내서/끓는물에 넣오라고/김부장이 시키드나” 짧지만 묘한 쾌감을 주는 시다. 네 글자의 운율에 강한 중독성마저 느껴져 무릎을 탁 치며 단번에 외웠다.
커피는 팍팍할 땐 위로가 되기도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이 벌어지는 요즘, 카페가 아닌 집에서 커피를 곱게 갈아 내려서 마시며 든 생각이다. 가족들과도 다소 떨어져 앉아 마시니 커피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소통의 매개체가 된다. 커피잔을 비우며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했던 말을 해 본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는 커피!”
커피를 주문할 때 머뭇거린 적이 여러 번이다. 맛과 향이 다양해지면서 메뉴판이 서너 장이나 되는 곳이 많아서다. 커피의 기본은 이탈리아 등 남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에소프레소. ‘빠르다(express)’와 ‘압축하다(press)’라는 말에서 온 에스프레소는 공기를 압축해 짧은 시간에 뽑아낸 커피이다. 여기에 무엇을 얼마나 섞느냐에 따라 커피 이름은 달라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2019년 스타벅스 빅데이터 분석 결과)는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배급받은 커피를 최대한 많이 마시기 위해 물을 탄 데서 비롯됐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우유를 섞으면 이탈리아의 카페라테, 프랑스의 카페오레가 된다. 카푸치노는 거품 낸 우유를 라테의 절반만 넣고 계핏가루나 초콜릿 가루를 뿌린 것으로, 이탈리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카푸친파 소속 사제의 복장 색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에스프레소에 우유 거품만 얹으면 마키아토이다. 우유를 점 찍을(marking) 정도로 적게 넣는다는 뜻이다.
새삼 20여 년 전 찾았던 이탈리아가 떠오른다. 비 내리던 봄날, 로마 판테온 부근의 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 글을 쓰는 내내 그날의 진한 커피향이 코끝을 맴돌고 있다. 커피의 천국 이탈리아가 코로나19로 국가적 위기를 겪고 있어 안타깝다. 가수 이한철이 동료들과 함께 부른 희망의 노래 ‘슈퍼스타’가 우리나라를 넘어 유럽 등 세계 곳곳으로 울려퍼져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이 봄이 가기 전 노랫말처럼 되리라 믿는다. “괜찮아, 잘될 거야!” jsjy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