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며 미국내 모든 대학과 대학원 졸업생에게 사비를 털어 선물한 ‘팩트풀니스’의 저자는 서문에서 미리 경고했다. 책에 나오는 ‘사실들’에 동의하지 못할 것인데, 끝까지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인내심은 100페이지 언저리에서 끝내 동났다. 내 돈 주고 산 책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라고 끝없이 강요해대니 점점 부아가 차올라서다.
온 세상을 숫자로 된 몇 개의 단계로 나누고 아프리카 저개발국 같은 밑바닥 삶이 하루 1~2달러라도 버는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고 있으니 스웨덴 출신 저자가 보기엔 세상이 좋아지고 있단다. 두 번째 단계도 물론 만족스럽지 않지만 굶는 것보단 나으니 긍정적이란다.
저자는 이미 수많은 사람과 논쟁을 벌여왔고, 그때마다 자신이 이겼다고 했다. 의심할 바 없는 팩트일 게다. 의사 출신 통계학자가 숫자와 그래프를 들이댈 테니 그저 측은지심과 감성 따위에 기댈 뿐인 반발심이 버텨낼 재간이 있을 리가. 덤으로 “좋다는 게 아니라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빠져나갈 구멍까지 파뒀으니 말 다했다.
첫 페이지부터 꾹꾹 눌렀던 이유 모를 불편함이 헛웃음으로 바뀐 것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다.
책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인한 방사능 때문에 사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고 수습 현장에 투입됐던 근로자 1명이 ‘폐암’으로 숨진 사실을 일본 정부가 확인했을 뿐이다.
저자는 방사능에 피폭돼 죽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공포의 무게에 깔려 보이지 않는다고 썼다. 당시 사고 여파로 죽은 사람은 1600명인데 이들은 모두 다른 지역으로 대피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로 목숨을 잃었고,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라 방사능 공포”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 희생자 수가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것처럼 왜곡돼 세상에 퍼져 나갔단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데이터에 근거한 주장에 귀 기울이는 능력이 마비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사고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방해한다”면서.
이 책은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가 팔렸다.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고, 언론의 찬사와 일독을 권하는 리뷰가 넘쳐난다. 빌 게이츠는 대학을 나서는 졸업생들에게 “내가 읽은 가장 중요한 책”이라며 엄지를 세웠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 목록 5권 중 하나”라고 추천했다. 권위 높은 네이처는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세계관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했고, 옵저버는 ‘금세기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가디언이 뽑은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랐다.
저자도 어마무시하다. 타임(Time)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이며, 이곳저곳에서 ‘가장 창조적인 인물 100인’, ‘세계 주요 사상가 100인’에 뽑혔다.
그런 저자가 “후쿠시마 방사능은 왜곡된 공포라는 게 팩트야. 아닌 것 같으면 나랑 맞짱토론 해보든지” 했으니 좀 배웠다는 사람들에게 방사능 우려를 말하면 멍청한 놈 되기 딱 좋아졌다.
그럼에도 한국에 살다 보니 무식하게도 방사능이 두렵다. 저자는 스웨덴에 사는지 책이 대박 나 뉴욕으로 이사 갔는지 모르겠으나 후쿠시마 근처에 눌러앉은 입장에서는 왜곡이고 나발이고 공포를 떨치기 어렵다.
어지러운 통계를 들어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다며 긍정 마인드를 강조하는 이 책, 다시 생각해보니 쓰레기통에 던지지 말았어야 했다. 더는 주변 사람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태워 없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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