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아 ‘평화’의 걸음을 내디뎠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일자리’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듯싶다. 얼마 전 정부가 2016년 1월부터 9월까지 ‘2030, 3040, 5060세대’의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물을 중심으로 빅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전 세대가 공통된 관심사로 일자리를 꼽았다.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팍팍한 세상살이다. 일자리 문제에 덩달아 ‘돈’이라는 고민거리도 공통된 관심사였다.
‘일자리와 돈.’
매년 이맘때쯤이면 불어오는 ‘바람’이 있다. 은행권의 희망퇴직 얘기다. 일자리와 돈으로 함축할 수 있을 거 같은 은행원들의 희망퇴직. 고액 연봉이란 꼬리표 탓이었을까. 이들의 희망퇴직에서 많게는 5억 원에 달한다는 특별 위로금에 눈길이 멈춘다. 표면적이긴 하지만 남들한테는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의미다. 어쩌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이들은 ‘칼바람, 절망퇴직, 감원한파…’ 등 언론이 붙인 희망퇴직 수식어에 이질감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은행원도 희망퇴직 앞에서는 애환이 있을 터다. 특별 위로금이 수억 원에 달한다 하더라도, 돈을 만졌던 ‘갑’에서 ‘을’로 졸지에 신분이 바뀌는 인생의 2모작의 첫 삽을 서둘러 뜰 필요는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는 작금의 현실이다. 스물네 살의 삶은 멈추었지만 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는 이 순간에도 돌아가고 있다. 화력발전소는 ‘일자리와 돈’의 시대적 논리에 석탄 대신 노동자의 목숨을 태워 가동된 셈이다. 두 해 전, 지하철 전동차는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 청년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역시 일자리와 돈의 시대적 논리가 열아홉 청년을 그 비좁은 스크린도어 안에 밀어넣었다.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명복을 빈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 이들에게 건낼 특별 위로금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연말, 1964년생 만 54세 은행원의 희망퇴직이 시작됐다. 막상 은행 문 밖을 나서려니 젊음을 바쳤던 ‘뱅커’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연봉이 높아 ‘신의 직장’이라 불렸던 은행에 청춘을 바쳤는데 ‘꽃가마’라도 타고 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은행도 그 수고를 알고 있는 듯하다. 꽃가마 대신 ‘특별 위로금’이라는 ‘돈 가마’를 선물한다. 최대 40개월치 급여, 5000만 원의 자녀 학자금, 창업지원금, 건강검진비 등 결코 서운하지 않은 위로다. 은행이 퇴직자에게 아이들 대학 학비까지 대준다니 임금피크제보다 나은 조건임은 틀림없다. 은퇴를 고려할 나이가 된 은행원들은 두 가지를 놓고 저울질한다. 고액 연봉을 받는 대신 오래 일할 기회를 주는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이거나 희망퇴직을 하거나. 은행의 정년은 60세, 55세부터 임금피크제가 시작된다. 그러나 대상자 대다수가 희망퇴직을 선택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선물 보따리가 기대 이상이란 의미다.
은행도 책임자급이 행원급 인력보다 많은 ‘역삼각형’ 인력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희망퇴직을 적극 권장한다. 당장 목돈이 나가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인건비 절감 효과가 커진다. 고액 연봉자 감소로 장기적으로 인건비 비중이 줄고 신입 행원 채용을 늘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셈이다. 매년 연초가 되면 은행권은 “청년 일자리를 많이 늘려 달라”는 금융당국의 주문을 받는다. 최악의 청년 실업을 겪고 있다. 은행 안팎으로 인력 구조 변화가 절실한 처지다. 희망퇴직과 신입직원 고용 확대는 은행권 전반에서 불고 있는 인력 구조 개편 움직임의 대표적인 사례다.
은행과 은행원 입장에서 희망퇴직은 매력적이다. 말이 ‘희망퇴직’이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가는 사람 심정도 있을 것이다. 은행을 나가서 “뭘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반대로 “뭘 할 게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년을 채우기 힘든 상황에서 은퇴 시기에 희망퇴직이 나은 선택이 아니겠는가. 아직 일할 수 있을 때 희망퇴직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선택일 수도 있다. 적어도 뱅커의 희망퇴직은 ‘바랄 희(希)’로 쓰이는 듯싶다.ac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