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이 찌고 볶는 ‘지옥여름’에

입력 2018-07-3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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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임철순 주필
▲임철순 주필
연일 찌고 볶고 삶는다. 사람 잡는 여름이 다. 에어컨 보급이 저조하고 휴대용 선풍기(이른바 손풍기)도 나오기 전이었으니 실제로는 1994년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잠을 잔 건지 기절했던 건지’라고 했던 그때 시사만화가 생각난다.

이 폭염은 전 지구적 현상이니 남극이나 북극에 가지 않는 한 더위를 쫓기 위한 생존경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하기 좋은 말이지만, 육신의 서늘함과 함께 마음이 상쾌해지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선인들은 어떻게 여름을 이겼나? 다산 정약용의 피서법에는 한유(閑裕)한 유머감각이 있는 것 같다. 그의 이른바 소서팔사(消暑八事)에는 빠짐없이 그늘이 등장한다. 솔밭에서 활쏘기, 달밤 개울가에서 발 씻기, 숲속에서 매미소리 듣기, 느티나무 아래서 그네 타기, 비 오는 날 한시 짓기 등…

여섯 수로 이루어진 다산의 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도 이런 유머감각이 두드러진다. 첫 번째 시는 민둥머리, 두 번째 시는 치아 얘기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꾸미느라 수고할 것 없이 시원하고, 이가 빠져 없으니 치통도 사라져 유쾌하다는 식이다.

사람에 치이고 더위에 지친 채 이런 마음을 부러워하며 한여름 나기를 생각해보면 독서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다. 중국 청나라의 문인 장조(張潮)가 지은 ‘유몽영(幽夢影)’은 감칠맛 나는 잠언집이다. ‘유몽영’이나 이와 비슷한 청언소품(淸言小品) 류의 시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글은 다 여름에 읽을 만하다.

하지만 장조가 권하는 걸 생각해보면 더 좋겠다. 책의 맨 앞에 이런 말이 나온다. “경서(經書)를 읽기에는 겨울이 좋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서는 여름에 읽는 게 좋다. 날이 길기 때문이다. 제자백가는 가을에 읽는 게 좋다. 운치가 남다른 까닭이다. 문집은 봄에 읽는 게 좋다. 기운이 화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소설, 그것도 대하소설을 읽는 게 어울린다. 사서오경과 같은 경전이나 사변적이고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철학사상서는 여름에 잘 맞지 않는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공신 증국번(曾國藩)도 “뒤숭숭한 날에는 경전을 읽고, 차분한 날에는 사서를 읽는다”는 글을 남겼다. 장조는 이런 말도 했다. “경전은 혼자 앉아 읽어야 좋고, ‘사기’와 ‘자치통감’은 벗과 더불어 읽는 게 좋다.”

그런데 계절에 앞뒤가 없듯이 경서와 사서의 독서에는 굳이 선후를 따지지 않아도 되나 보다. 장조는 “경서를 먼저 읽고 나서 역사책을 읽으면 일을 논함에 성현과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다. 역사책을 먼저 읽은 후 경서를 읽으면 책을 봄에 한갓되이 구절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기야 세상일은 무엇이든 서로 어울리게 만드는 게 중요하지 무 자르듯 구분하거나 선과 악으로 편을 갈라 줄 세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경서를 사서 읽듯 사서를 경서 읽듯 해야 좋은 독서인, 교양인이 될 수 있다.

철학서적이든 추리소설이든 거기엔 인간이 있고 인간의 삶과 앎이 다 들어 있다. 넓게 그리고 정밀하게 읽는 이른바 박이정(博而精)의 정신으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조화, 인문교양과 과학기술의 융합을 지향해야 한다. 또 한 번 장조를 인용하면 “널리 읽고 두루 경험하는 섭렵을 쓸모없다고 말하지만, 고금에 통하지 못한 것보다는 낫다. 맑고 고상한 청고(淸高)는 아름답다고 할 만하나 시무(時務)를 모르는 쪽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게 있지만 이로운 것만 있고 해로운 게 없는 건 오직 독서뿐(‘취고당검소’의 글)이다. “봄비는 독서, 여름비는 바둑, 가을비는 추억, 겨울비는 음주에 제격”(역시 장조)이라는 말도 있다. 독서는 사시사철 해야 하는 일이지만, 책이건 뭐건 다 좋으니 우선 비가 좀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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