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세월호 참사로 8세인 A양은 홀로 남겨졌다. 온 가족이 제주도 새집으로 이사 가던 중 일어난 사고였다. 부모와 오빠를 모두 잃은 A양을 고모 B(53)씨가 맡았다. 사고 이후 B씨는 조카의 법적 대리인이 되고자 법원에 미성년후견인 선임심판을 청구했다. 성인(19세)이 될 때까지 A양을 돌보고 재산 등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A양 부친의 시신을 세월호에서 인양하지 못해 사망이 확정되지 않아 재판은 미뤄졌다. 대신 법원은 B씨를 A양의 임시 후견인으로 정했다.
하지만 국민성금‧보험금‧배보상금 등 15억 원 상당의 돈을 관리하는 게 문제였다. B씨는 안전하게 돈을 관리해 A양이 성인이 될 때 온전하게 돌려주고 싶었다. 주변에 의심의 눈초리를 무시할 수 없었고, 자신에게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고민하던 B씨는 은행에 돈을 맡기는 신탁계약을 체결하기로 하고, 법원에 이를 허가해달라고 신청했다. B씨가 신청한 ‘특정금전신탁’은 금융기관이 고객이 지정한 방법에 따라 자금을 운용한 뒤 그 수익을 돌려주는 상품이다.
혈혈단신으로 남겨진 어린이가 거액을 소유하고 있다면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은 사례가 비일비재한 슬픈 현실에서, A씨를 보호하려는 B씨의 정심(正心)이 법원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서울가정법원 24단독 이진영 판사는 B씨가 낸 임시후견인의 권한초과행위허가 신청을 받아들였다고 18일 밝혔다.
이번 법원 판결로 A양의 재산은 30세가 될 때까지 은행이 관리한다. A양은 계약 기간 동안 매달 자신의 계좌로 250만 원을 받는다. 만 25세가 되면 남은 재산의 절반을, 만 30세에는 나머지 재산을 갖는다.
미성년 후견인이 신탁 청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 민법은 친족 중 가장 가까운 연장자가 자동으로 후견인을 맡도록 했다. 하지만 후견인이 미성년자가 물려받은 재산을 탐내는 등 부작용이 생기자, 2013년 7월부터 법원이 후견인을 정하고 관리ㆍ감독을 하도록 민법이 바뀌었다. 그런데도 뒤늦게 재산을 빼돌린 것을 알아채는 등 빈틈이 생기곤 했다.
후견 사건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개인 신탁은 보편적이지 않아 잘 활용되지 않았다”며 “아무도 못 건드릴 수 있으므로 재산관리방법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세월호 사건뿐만 아니라 교통사고나 범죄 등으로 부모를 잃은 미성년자의 재산을 금융기관 신탁을 통해 안전하게 관리해 미성년자의 복리를 지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