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1832년 6월 6일 이 말로 상징되는 영국 공리주의 창시자 제러미 벤담(1748.2.15~1832.6.6)이 사망했다. 옥스퍼드대 출신의 변호사이자 철학자이며 사회개혁가이고 법학가였던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 법률,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여러 개혁안을 내놓았다.
벤담은 이치에 맞고 구체적인 성문법을 집대성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개척자였다. 정교분리와 표현의 자유, 양성평등, 보통선거와 비밀투표 등 오늘날 법률체계에도 벤담이 주창한 사상들이 녹아 있다. 심지어 벤담은 동물권리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존중받아야 할 권리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인가’가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전제로 결정돼야 하며 이에 동물도 인간처럼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쾌락과 고통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경제학의 핵심 개념이 되는 ‘효용’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 그는 공리주의에 입각한 경제론으로 복지경제학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교도소와 학교, 병원, 병영 등 근대 건물 시스템에도 벤담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판옵티콘’이라는 저서에서 소수의 감시자가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고 모든 죄수를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의 감옥을 제안했다.
벤담은 자신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보관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칙을 말한 사람답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의학 해부용으로 자신의 몸을 내놓은 것이다. 또 자신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의 시신을 남기면 후학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는 자신감도 그 배경에 있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해부를 거쳐 미라로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런던대에서 전시되고 있다.
배준호기자 baejh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