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남부 민다나오 섬 다바오 시장인 로드리고 두테르테(71)의 승리가 확실시되고 있다. 범죄와 부패를 제압해온 그의 카리스마가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얻으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됐다. 그러나 ‘필리핀판 트럼프’로 불리는 그의 경제 및 외교 정책에 대한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시장에는 새 정권이 출범하기도 전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10일 오전 개표가 약 91% 진행된 가운데 그의 지지율은 39%를 차지했다.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명한 집권자유당의 마누엘 로하스(58)는 23%, 무소속의 그레이스 포 상원의원(47)은 22%로 개표율 상 역전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포 의원은 9일 심야 기자 회견을 통해 패배를 인정했다.
대통령 당선자는 국회에서의 최종 승인을 거쳐 6월말 차기 대통령에 취임한다. 새 대통령은 성장 궤도에 오른 필리핀 경제의 수장으로서 남중국해를 둘러싼 지역 안보에도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등 외교 정책에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
차기 대통령에 오를 두테르테는 법망을 초월한 방법으로 다바오 시의 치안을 개선시킨 이단아로 통한다. 국제사회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폭언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그에게서 일반 정치인과는 다른 카리스마를 발견했다. 강력한 실행력에 대한 기대감은 이번 대선에서 투표로 이어졌다. 이번 선거에서 두테르테에게 투표했다는 마닐라의 한 여성 직장인은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아키노 정권 하에서 필리핀은 2005년 6%의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하지만 빈곤율은 10년 전부터 인구의 4분의 1로, 빈부 격차가 변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했다. 고층 빌딩 건설 붐이 일고 있는 마닐라에서조차 아직도 빈민가에 사는 사람이 대다수다. 이들 빈곤층은 두테르테라면 세상을 바꿔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중산층은 심각한 교통 체증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대중 교통 인프라가 정비돼 있지 않아 출퇴근에 왕복 5~6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해외로 보낸 이주 노동자의 외화 송금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도 마르코스 장기독재 정권이 무너진 민중혁명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쌓이고 쌓인 불만이 두테르트라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두테르테는 1945년 3월 중부 레이테 섬에서 태어났다. 1977년 민다나오 섬 다바오 시 검사를 역임하고, 1988년 다바오 시장에 당선됐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민다나오 출신의 첫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그는 다바오 시에서 검사를 하다가 범죄학으로 교단에 섰다. 1988년에 시장에 첫 당선, 재선은 2회로 제한되기 때문에 네 번째 임기에 해당하는 기간은 딸을 후임으로 지명한 후 다시 원래 자리에 앉는 방식으로 사실상 장기 집권을 계속해왔다.
두테르테 시장은 22년간 다바오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다바오 시를 필리핀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는 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범죄자를 살해하는 암살단이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암살단은 마약 딜러 등을 초법적으로 응징하는 조직으로, 두테르테가 이끌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으나 그 실체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막말 등으로 현 정부는 물론 국제사회로부터도 자주 비판을 받고 있다. 호주 여성이 강간 끝에 살해된 것을 놓고 농담했다가 호주와 미국 대사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되레 양국과 외교관계를 끊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불안한 이유다. 두테르테는 대통령이 된 후 무엇을 어떻게 바꿀 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각각의 불만을 해소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막연한 ‘변화’에 한 표를 행사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필리핀 내에서도 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이같은 불안감은 증시에도 반영됐다. 개표 상황이 전해지자 그의 경제·외교 정책이 불확실한 가운데 경제 성장을 이끈 아키노 현 정권의 노선이 중단될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에 이날 필리핀 증시는 주저앉았다. 10일 필리핀 증시에서 PSEi는 하락해 한때 약 2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수는 큰 혼란을 빚지 않고 낙폭을 만회했으나 중장기적인 정책 운영이 불확실하다는 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