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많은 부분 보장되는 북유럽 같은 나라의 경우겠거니 하고 생각하기 쉽다.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적용되는 얘기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9조 3항과 4항에는 여성 근로자에게 육아휴직을 이유로 불리한 처우를 하는 경우가 금지돼 있다.‘불리한 처우’란 승진, 승급, 퇴직금, 연차휴가 일수 등에 있어 육아휴직 기간을 근속기간에 포함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법과 현실은 아직 괴리가 있다. 특히 육아휴직을 썼다가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고 해도 이를 갖고 따지게 되면‘같이 일하기에 불편한 사람’ 취급을 받아 오히려 더 불리해질까봐 여전히 많은 경우 불만을 속으로 품은 채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래도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이런 소극성은 조금씩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는 모습이다.
한화그룹은 지난 2000년 여성공채를 시작한 이래 과거 남성 중심적이었던 문화를 바꾸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 왔다. 계열사인 생명보험 업계 2위 한화생명도 마찬가지. 2002년 대한생명 인수합병(M&A)으로 그룹에 편입된 이후 여성 친화적 기업이 되기 위해 흘린 땀이 하나씩 결실을 맺고 있는 모습이다.
보험설계사(FP)까지 치면 전체 직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기도 하지만 2002년 이후 지속적인 여성 인재 발굴, 육성에 나서 2000년 이전 일반직(사무직) 가운데 여성 비중은 10% 미만이었지만 2010년 이후 15%까지 늘었다. 아직까지 자체 승진을 통해 여성이 임원이 된 경우는 없다. 하지만 성장하고 있는 여성 인력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어 이들이 간부를 거쳐 임원이 될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아 보인다. 현재 대리급 직원 가운데 여성이 60%가 넘으며 과장급에서는 13~14% 가량, 차장 이상도 여성이 7% 이상이다. 2010년 이전엔 차장급 여성은 3%도 안 됐다.
권철오 한화생명 인사팀 차장은 “2002년 이후 뽑힌 여성 인재들이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고 있는 것이 수치로 확인된다.”면서 “신입 직원들 채용에 나서보면 여성들의 경우 오버 스펙(over-spec: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직무능력을 갖춤)인 경우가 많고, 도전적으로 입사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험사라는 특성상 ‘굳이’ 여성 직원들을 늘릴 필요도 있다. 구매력과 경제력을 갖춘 여성 고객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감성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보험 구매로 이어지도록 하는 포인트는 여성이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외부 출신이지만 마케팅을 총괄하는 전문가로 여성인 황인정 상무가 영입된 것도 같은 일환이다.
권철오 차장은 “마케팅 외에도 보험사 내의 핵심 업무랄 수 있는 상품 개발이나 언더라이팅(Underwriting: 보험계약에서 위험을 평가하고 인수ㆍ조정ㆍ거절 등의 결정을 내리는 행위) 부문에서 여성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을 수 밖에 없다.”고 전하고 “보험상품 개발에 있어 위험을 분석해 보험료를 산정하는 일을 하는 계리사 자격증 소유자들도 경쟁력있는 여성들이 많다.”고 전했다.
우수한 여성 인재가 채용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조직 내에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커 나갈 수 있으려면 아직은 ‘도움닫기’가 필요하다. 특히 업무 능력 향상이나 승진에 있어 중요한 시기와 출산ㆍ육아 시기는 대개 맞물리게 마련. 이것은 개인의 오기나 운 만으로는 도저히 극복이 어렵다. 한화생명에서는 여성들이 출산이나 육아 때문에 상당기간 일을 쉬어야 하는 경우도 모두 근무기간으로 인정하는 문화가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출산휴가 3개월에 이어 1년간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것을 눈치보지 않는 젊은 여직원들이 많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남성이 육아휴직을 신청하기도 했다.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면 휴직 후 복귀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란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그룹 전체적으로 행하고 있는 대로 임신한 여성 직원에게 허리보호대, 임신했음을 알려 타인들이 알아서 조심해 행동하도록 분홍색으로 된 출입증 홀더, 튼살크림 등이 들어있는 ‘맘스 패키지’를 제공하고 있으며, 임신으로 힘들거나 출산 후 모유 수유 등을 해야하는 직원들을 위해 ‘맘스룸’을 만들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건물 내에서 전망이 좋은 45층 한 켠에 마련된 맘스룸은 개인별 유축실이 따로 마련돼 있을 만큼 신경써 만들었다. 모유 착유 시간은 출산일로부터 1년간 보장되며 아이를 갖기 어려운 난임 여성의 경우 최대 90일까지 휴가를 쓸 수도 있다. 직장 어린이집은 그룹 전체적으로 현재 여의도 63빌딩과 태평로 건물에 두 곳이 마련돼 있어 가까운 계열사 직원들과 함께 이용할 수 있으며, 전국 7곳에 설치할 예정이다.
9개월 전 둘째를 낳고 복귀한 한상엽 IR팀 대리는 “첫 째 때는 화장실에서 유축을 했지만 이제는 맘스룸을 통해 마음 편히 유축도 하고 쉴 수도 있어 좋다.”면서 “저는 육아휴직을 쓰지 않았지만 점점 젊은 여성 직원들 사이에서 임신과 출산이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데, 여기엔 회사의 제도적 지원이 도움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