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포니(Pony)’가 1975년 12월 첫선을 보인 지 올해로 꼭 40년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국산 고유 모델 포니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국내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소형차 중심으로 바꾸고 마이카 시대를 열었으며, 단순한 자동차를 넘어 한국 공업화의 상징이 됐다. 많은 국민들에게 ‘생애 첫 차’로 추억되는 포니를 더듬어 본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요즘은 자동차가 일상생활의 필수품처럼 여겨지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동네 도로에 자가용 자동차가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던 때였다. 자동차가 많아지게 된 계기는 국산자동차 ‘포니’ 출시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마이카’를 갖는 사람들이 점차 늘었다. 포니가 잘 팔려나갈수록 자동차산업 발전의 기반이 단단해졌다. 또한 자동차산업은 원조경제를 막 벗어난 걸음마 단계의 한국 산업이 보다 고도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회사 망합니다’ 직원들도 말린 무모한 도전
자동차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작용한다.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도 연간 5만 대 이상을 생산하지 못하면 채산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후진국 자동차업체들로서는 해외 유명 모델을 그대로 도입해 일단 채산성을 맞추는 전략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고(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은 곧바로 고유모델을 개발하는 공격적 전략을 택했다.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동차 관련 기술은 ‘백지상태’에 가까웠다. 국내에서 생산된 자동차라고는 미군이 버리고 간 지프차량을 뜯어 만든 ‘시발(始發)차’ 정도였다. 자동차는 2만여 개 부품이 들어가는 ‘기계공업의 꽃’으로 불리지만 국내 기술력으로는 부품 한 개도 제대로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대차 기술자들조차도 ‘자칫 회사가 망하게 될 수 있는 위험한 계획’이라며 정세영 전 회장을 말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달리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만은 개발 계획을 흔쾌히 승낙했다. 현대는 처음부터 국내시장은 물론 세계시장을 겨냥해 무모할 정도의 투자를 감행했다. 정부의 자동차 육성 계획보다 오히려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伊·日서 코피 쏟으며 공부, 전쟁처럼 치른 개발·생산
맨땅에서 자동차를 만들어야 했다. 막상 시작하긴 했지만 부품을 도면으로 그리는 방법조차 몰랐다. 더구나 당시 한국에는 도면을 줘도 만들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정세영 회장은 자동차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 날아간 이탈리아에서 36세의 젊은 디자이너를 만났다. 오늘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다. 그의 감각을 알아본 정 회장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미화 120만 달러에 고유모델 디자인을 의뢰했다.
자동차의 기본 골격이 되는 엔진, 트랜스미션, 프레임 등을 포함한 플랫폼이 필요했다. 자체 개발은 불가능했다. 현대자동차는 플랫폼을 구하기 위해 GM사와 포드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거절당했다. 다행히도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이전 협약을 체결했다. 미쓰비시 구보 도미오(久保富夫) 회장 가족 중 한국인 혈통을 활용해 정주영 회장이 수완을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현대차는 이탈리아와 일본에 각각 연수팀을 보내 설계도면 제작과 엔진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불과 몇 개월 내에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연수팀은 매일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했다.
생산현장은 흡사 전쟁터였다고 한다. 생산근로자들은 아침 8시에 출근해 다음 날 밤 10시에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틀 밤을 새우는 ‘이철’, 사흘 밤을 새우는 ‘삼철’ 등의 단어도 이때 생겨났다. 첫 고유모델 생산은 온 나라의 관심을 끌었다. 차 이름은 전 국민 대상 공모를 통해 정했다. 공모에는 태양, 새마을, 아리랑 등 6만 장에 가까운 엽서가 접수된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폐허에서 세계 8번째 고유모델 車 생산국으로
포니가 첫선을 보인 곳은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제55회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였다. 현대자동차와 대한민국의 세계 자동차시장 데뷔였다. 포니에 대한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세계의 가장 가난한 나라가 여덟 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출품했다는 점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포니신화’의 시작이었다.
1975년 12월 생산설비 완공과 함께 포니 차량 양산이 시작됐다. 이듬해 2월부터는 시판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첫해인 1976년에는 1만726대, 1977년에는 2만4000여 대가 팔렸다. 외국차 일색이었던 서울 시내 도로를 오렌지색, 하늘색, 녹색의 포니가 대신 채워갔다.
염원이었던 해외 수출도 시작됐다. 첫해 1019대였던 수출 물량은 1977년 4523대, 1978년 1만2195대 등으로 급신장한 뒤 1982년에는 30만 대를 돌파했다. 1986부터는 미국시장에 입성, 첫해 16만8800대, 이듬해에는 26만여 대의 판매 성적을 올렸다. 대성공이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군용차로 차를 만들던 한국이 미국 시장에 고유의 차량을 수출하게 된 극적인 장면이다.
마흔살 포니가 대한민국에 남긴 것은
지난 7월 미래창조과학부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광복 이후 과학기술 성과 70선’ 선호도 조사를 한 바 있다. 포니는 기계소재 분야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으며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포니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포니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문가들은 포니가 국내 자동차산업의 자립과 경제도약의 발판이 돼 줬으며 국민의 자긍심도 높였다고 평가한다. 포니와 함께 본격적으로 출발한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지난해 기준 세계 자동차생산 5위, 수출 9위를 기록하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강, 합금, 플라스틱, 유리가공 등 수많은 산업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자동차산업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수출주도형 경제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고, 세계에서 가장 빈곤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바라보는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