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경연(知經筵) 이유(李濡)가 아뢰었다. “고 참판 이단석은 청백하기로 이름났는데, 죽고 나서는 송곳 하나 세울 땅도 없어 그의 아내가 언서(諺書)로 단자(單子)를 올려 급박함을 구해 달라고 빌었으니 가련하기 그지없습니다.”[故參判李端錫 以淸白見稱 死無立錐之地 其妻至以諺書呈單 乞得救急之資 其情可慼] 그는 이어 “여기에서 그가 청백했다는 것을 더욱 증험할 수 있으니 진휼청에 금년을 기한으로 매달 쌀 1곡(斛)씩 지급하게 하는 것이 청렴을 권장하는 법전에 부합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임금이 옳다고 했다.
태종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1401년에 신문고를 설치한 바 있다. 연산군 때 중단됐다가 영조 때 부활된 민의 상달 제도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로서는 대궐 문루에 올라가 북을 치기보다 언문으로 글을 써서 올리는 게 쉽고 효과도 컸던 것 같다.
숙종실록에 나오는 입추지지(立錐之地)는 송곳 하나 세울 만한 땅이니 매우 좁아서 조금도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흔히 “입추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사기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역이기(酈食其)가 유방에게 한 말로 기록돼 있다. “진나라는 도의를 저버리고 제후의 사직을 마구잡이로 토벌해 6국의 후손들이 재기할 바탕을 없애버렸습니다.”[秦 失德棄義 侵伐諸侯社稷 滅六國之后 使無立錐之地]
‘장자’ 잡편의 도척(盜跖)편에는 이 말이 치추지지(置錐之地)라고 나온다. 도척이 공자를 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성이 크다 한들 천하보다 크겠느냐? 요순 임금은 천하를 다스렸지만 그 자손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었다.”[城之大者 莫大乎天下矣 堯舜有天下 子孫無置錐之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