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13일 동안 밀당했던 ‘유승민 파동’의 승자는 박 대통령일까. 아니다. 겉으로는 분명 박 대통령이 승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 실리에선 유 의원이 이겼다.
유 의원을 끌어내린 박 대통령은 여전히 ‘힘 센 정치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자신의 뜻에 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특히 새누리당 의원들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당분간은 그 누구도 반기를 들기 쉽지 않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동안 친박과 비박으로 나뉘어 치고받았던 시간을 돌이켜 보면 적어도 정책적인 부분에서는 교통정리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눈으로 바라본 대통령의 모습은 섬뜩할 뿐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한 뒤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 여당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고 작심한 듯 쏘아붙였다. 대통령이 국무위원들과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여당 원내대표 개인을 향해 이처럼 분노를 표출하는 건 드문 일이다.
박 대통령은 “정치는 국민들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고 국민들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유 의원을 찍어냈다. 이를 지켜본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박 대통령은 또 지난 3일 광주 유니버시아드 개막식에서 함께 참석한 김무성 대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무언의 경고였다. “시간 한 번 내달라”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요청도 무시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대화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옹졸하다. ‘공포정치’, ‘불통정치’ 등의 부정적 수식어가 박 대통령을 여전히 따라다니는 이유도 바로 이런 데 있다.
반면 유승민 의원은 원내를 통솔하는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대통령의 공포정치에 맞섰던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층 더 성숙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개혁적 보수’를 내세워 기성 보수에 대항한 그는 대한민국의 보수가 아직 건전하다는 걸 보여줬다.
개혁적 보수라는 그의 지향점 역시 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복지 확대’, ‘경제 민주화’ 등을 내세워 당선됐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틀렸다고 볼 수 없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현실적인 그의 말이 진리라는 것은 세수 부족에 허덕이는 정부가 이미 증명했다.
박근혜 정부 집권 전환기를 맞은 새누리당의 가장 큰 고민은 정권을 재창출하는 일이다. 주자는 많지만 확실한 보증수표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눈치 보는 데 급급해 유 의원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던 김무성 대표가 여권 내 차기대권 1위 주자다. 집권여당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유 의원에게는 더 큰 곳으로 나아갈 기회를 가져다줄지도 모르겠다. 실제 파동 직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그는 16.8%의 지지율로 김 대표(19.1%)를 바짝 뒤쫓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행보다. 정치인의 지지율이라는 건 언제든 엎어질 수 있다. 반짝 지지에 그칠지, 한 걸음 더 나아갈지는 전적으로 그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