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慶喜宮)을 아십니까? 하고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모 오피스텔 이름인 ‘경희궁의 아침’은 들어 봤는데 라고 대답한다. 또 어디 있는지 알아 하고 질문을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지르며 어디에 있는데? 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경희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1620년에 완성된 조선 후기의 이궁이다. 또한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요성을 간직한 궁궐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과 더불어 서울의 5대 궁궐로 꼽힌다. 경희궁의 시작은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왕권 확립을 위해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을 몰수하여 새문동(지금의 신문로2가)에 경덕궁(慶德宮)을 만들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새 궁궐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 비운을 맞는다. 당시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바로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綾陽君)이었으니 새문동 왕기설은 어느 정도 적중된 셈이었다. 그리고 경덕궁은 1760년(영조 36) 원종(元宗)의 시호가 ‘경덕’(敬德)으로 같다 하여 궁의 이름을 ‘경희’로 고쳐 지금의 경희궁이 되었다.
지난 12일 휴일을 맞아 경희궁을 찾았다. 운 좋게도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경희궁을 둘러 볼 수 있었다. 문화 해설사는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고 1820년대 경희궁 전경을 그린 〈서궐도안〉(西闕圖案)을 보면 당시 120여채, 7만 평의 큰 규모에 궁임을 알 수 있다.” 고 옛 규모를 설명하며 지금의 경희궁을 아쉬워했다. 20세기 초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1910년 일제는 경희궁의 전각 대부분을 헐어냈다. 이때부터 경희궁의 면적은 절반 정도로 축소되고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던 궁궐은 과거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뒤로도 일제의 경희궁 파괴는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궁궐 영역에 관공서의 관사를 짓거나 그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키기도 했으며,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모두 외부로 매각처분하였다. 특히 왕의 처소를 방공호라는 흉물로 만든 것은 일제 만행에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터만 남다시피 했던 경희궁은 1984년 서울시에서 매입, 경희궁터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 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는 시민에게 공개해 지금 모습을 갖추고 있다. 경희궁 안에는 몇몇 남은 정전과 유적들이 많은 볼거리를 재공 한다. 먼저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옛 경희궁의 금천교가 복원되어 있다. 오래된 석축과 석재들로 만들어져 묵은 돌에 담긴 견고함과 당당함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금천교를 지나 조금만 걷다 보면 경희궁의 입구 웅장한 홍화문이 나타난다. 경희궁에 남은 유일한 옛 건물로 창건 때의 모습을 비교적 충실히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이기도 하다. 흥화문을 들어서면 넓은 잔디밭 주변으로 간이의자들이 놓여 있고 길이 잘 닦여 있어 산책을 즐기기에 알맞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정갈한 옛 경희궁의 외전을 이루던 주요 전각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숭정문·숭정전·자정문·자정전 등의 전각들은 건물들을 연결하는 회랑들과 함께 잘 복원되어 있다. 특히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고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태령전 뒤에는 새문동 왕기설이 서린 기이한 모양의 바위 서암도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