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 해서 ‘삼포(三抛) 세대’라 불리던 20대가 ‘오포(五抛) 세대’로 진화(?)했다고 한다. 삼포에다 연애 포기와 사회관계 포기 두 가지를 더해 오포가 되었다는 게다. 특별히 연애를 포기한 이유가 궁금해서 두루 정황을 살펴보니, “연애에는 돈이 필수인지라, 정말 돈이 없어 (연애를)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20대 후반~30대 초반을 대상으로 이들의 통상적 연애 관행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연인들은 학력이 높든 낮든, 자신의 수입이 많든 적든,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중상류든 중하류든, 너나없이 명품을 주고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명품 선물의 일차적 수혜자는 여성이지만, 상대 남성도 여성 못지않게 명품 세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인들 사이에선 상대가 선물하는 명품 가격이 비싸면 비쌀수록 사랑의 강도 및 밀도 또한 높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니, 사랑의 세대차에도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믿거나 말거나, 구찌 핸드백을 선물 받은 여성은 ‘이 남자가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여 실망을 금치 못하는 반면, 샤넬 핸드백을 선물 받은 여성은 ‘이 남자가 나를 진정 사랑하는구나’ 해서 기쁨의 미소를 짓는다지 않는가. 값비싼 명품을 선물 받은 여성들은 고마움도 전하랴 자신의 마음도 표현하랴, 남자를 위해 명품 넥타이나 벨트 혹은 구두를 선물해주는 것이 불문율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만난 지 22일 기념부터 시작하여 발렌타인데이에 화이트데이를 거쳐 100일 기념에 200일 기념 등 각종 기념일을 챙기고 적정 수준에서 이벤트까지 즐기노라면 1달 평균 데이트 비용이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 하니, 돈 없으면 연애는 꿈도 못 꾼다는 말이 과장에 엄살만은 아닌 듯도 하다.
예전 배고팠던 시절 연인들은 기본 안주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도 풋풋한 사랑을 키워갔고, 오히려 연인들 사이에 물질이 끼어드는 건 속물스러움의 징표인 것 같아 애써 외면하곤 했었는데, 이젠 사랑의 크기가 명품 가격으로 재단되고 사랑의 깊이가 브랜드 이름에 따라 계산되는 시대가 되고 만 셈이다.
연인들 사이에 명품 교환이 성행하고 각종 이벤트가 유행처럼 번지는 현실이야말로, 연인관계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점차 커지고 있음의 방증일 것이다. 폴란드계 미국인 사회학자 Z. 바우만에 따르면, 현대사회로 올수록 우리네 인간관계는 헌신을 요하는 몰입(commitment)으로부터, 원할 때 쉽게 들어갔다 다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망(network)으로 변화해간다고 주장한다. 연인관계도 바우만의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결국 관계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벤트 속에서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관계의 불안정성에 대한 아쉬움을 명품 교환으로 대체하는 건 아니겠는지.
현재의 출산율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한국사회는 가파른 고령화 곡선에 더하여 머지않아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의미하는 ‘인구 절벽’이 시작될 것이란 전망인데, 유럽처럼 결혼과 출산을 분리할 생각이 아니라면, 결혼으로 가는 길의 장벽을 낮추어주는 일이 묘안일 것 같다. 낭만적 관계에 뛰어든 명품의 허세와 물질주의의 천박함을 거두어낸 후, 진정한 연인이라면 그 무엇으로도 대체불가한 관계 속에서 가득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의 불씨가 다시 지펴지길 새해 소망으로 삼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