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숨길 때가 없다. 땅 파서 돈을 묻어놔야 하나.”
고액자산가들이 주로 찾는 한 시중은행 PB센터 L팀장은 오는 28일 차명거래금지법 시행을 앞두고 고객들의 반응을 이같이 전했다.
당장 차명거래금지법이 시행되면 타인 명의의 통장에 돈이 입금되는 시점부터 증여로 봐 세금(증여세)이 추징되기 때문이다. 또 불법 차명거래에 대한 처벌 수위 또한 대폭 강화된다. 이번에 개정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은 차명거래가 밝혀질 경우 세금과 가산세가 추징되고, 명의를 빌려준 사람도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차명거래 금지에 고액예금 이탈 = 고액자산가들의 재테크 셈법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미 이들은 차명계좌금지법을 회피하기 위한 대응을 시작했다.
A은행 PB센터 L팀장은 “지난 5월 법안 통과 시점부터 자산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며 “이미 기존의 차명계좌들은 대부분 정리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산가들 사이에선 예금 자산을 현금화해 금고에 비축하거나 실명 전환 또는 합법적인 증여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것으로 금융권은 분석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월부터 상속세나 증여세법의 차명계좌증여추정 규정과 금융정보분석원(FIU)법에 따라 자산 은닉자에 대한 세금 추징이 강화되면서 사전에 한두 차례 정리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L팀장은 “과거엔 차명계좌가 의심되는 사례가 종종 눈에 띄였다”면서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피하려고 가족 등의 이름으로 계좌를 분산시킨 경우가 대표적인 케이스였지만 올해 들어서는 이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비자금, 탈세자금, 사채자금 등 떳떳하지 않은 사연을 가진 검은 돈이 아니라면 차명계좌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회피하기 위한 음성적 자금 흐름이 어느 정도 차단된다는 분석이다.
고액자산가 일부는 차명계좌금지법을 앞두고 몸을 사리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갑작스럽게 많은 자금의 이동이 노출될 경우 자금 흐름이 금융당국이나 세정당국에 포착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L팀장은 “아직 명확한 스탠스를 취하지 않은 자산가들이 있다”며 “이들은 차명계좌금지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 금융시장이나 주위 사례들을 꼼꼼히 체크한 후 움직이겠다는 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이 경우 자금 추적을 피해 음지로 숨을 개연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자산가 재테크 패러다임의 전환 = 일단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차명거래만큼은 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지배적이다. 절세효과를 노릴 수 있는, 즐겨 쓰는 재테크 전략 중 하나였지만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커 울며 겨자 먹기식 실명전환이나 부동산이나, 금 등 실물투자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 2억원을 은행에 예치한다고 가정했을 때 가족이 네 명이라면 예금자보호 한도인 5000만원씩 분산시켜 금융소득을 분산해 납세 규모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자산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금이나 5만원권과 같은 실물자산으로의 전향, 부동산 투자 등으로 국한될 전망이다. 실제 최경환 부총리가 적극적인 경기부양 의지를 내비침에 따라 실물에 대한 자산가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또한 자금을 본인 명의로 관리하면서도 절세를 할 수 있는 비과세 상품에 눈길을 주고 있다. 저축성 보험의 경우 5년 이상 납입하고 10년 이상 유지하면 발생 이자에 대해 절세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개인투자자가 얻은 자본차익에 대해 세금을 떼지 않는 주식 및 주식형펀드 상품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9월 초부터 한 달여 동안 국내 주식형펀드로 유입된 자금은 규모가 1조7000억원에 이른다. 때문에 향후 자산가들의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계속 유입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고액자산가들 사이에선 올 상반기 해외금융계좌납세협력법(FATCA)이 이슈였다. 하반기 들어서는 차명거래금지법이 최대 돌발변수로 꼽히고 있다.
L팀장은 “7월부터 시행된 FATCA는 정부의 과세의지가 해외계좌에까지 미쳐 국적 포기 사례가 잇따를 정도로 자산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며 “차명계좌 금지법은 관련 논의가 본격화된 지난해부터 자산가들이 사이에서 이슈가 될 정도로 향후 이와 관련한 재테크 변화를 큰 것”이라고 전망했다.